미국도 패배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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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11 이후 많은 이가 『문명의 충돌』을 얘기했다. 서방·중국·슬라브·이슬람 등으로 느슨하게 뭉쳐진 문명권의 각축이 시작될 것이라는 취지로 새뮤얼 헌팅턴이 끊임없이 인용됐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미국을 악마로 몰아붙일 때 그런 논의는 더욱 그럴 듯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후쿠야마의 『역사의 끝』이 내겐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사엔 하나의 진행방향이 있다는 게 후쿠야마의 생각이다. 우발적인 사건은 없으며 역사의 순환도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들이 벌이는 경쟁으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서구가 지난 수백년간 사용했던 아이디어들 중에는 귀족정치, 왕정, 종교지배, 나치즘으로 끝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등이 있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가 그 모든 아이디어들을 물리쳤으며 최소한 현재의 사회적 합의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정교분리, 보통선거, 자유언론, 법앞에서의 평등, 자유경제 등이 자유민주주의의 주요 특징들이다. 서구사회는 현재 실업·교육·의료보장 등 사회를 어떻게 미세조정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들만을 논의한다. 이미 커다란 문제는 해결했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비서구사회에서도 역사의 끝은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10년 전 한때 아시아적 가치가 많이 거론됐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극히 예외로 결국은 다시 아시아화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만·필리핀·한국의 민주주의를 보라. 태국과 인도네시아도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인도는 자유민주주의만이 종교와 언어·종족이 서로 다른 10억의 인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발견했다. 중국은 꾸준히 경제를 자유화하고 있다. 심지어 북한도 살아남기 위해선 근대화를 해야 한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빈 라덴은 서방세계가, 특히 미국이 근대화와 정교분리의 배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항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을 개종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이슬람 신도들이 '역사의 끝'에 다가가는 것을 막는 게 그의 주된 관심이다. 그가 컴퓨터와 국제 금융거래, 제트여객기를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근대화됐으면서도 무슬림들을 근대 이전의 완고한 이슬람에 묶어두려 한다는 게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슬람 국가의 정부는 예외없이 권위주의적이다. 그들은 1년 전 미국이 대테러 전쟁을 선포했을 때 앞장서 미국의 동맹국이라 자처했다. 국내의 반대파를 테러분자로 규정해 탄압하는 게 막연히 이슬람의 연대를 부르짖는 것보다 실익이 크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엔 반대한다. 뒤이어 들어설 이라크의 민주정부가 그들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까 두려워서다.

비록 미국에서 테러 혐의자로 체포되고 추방된 사람들은 예외없이 무슬림이었다고 해도 부시 행정부는 이슬람과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다. 부시는 역사의 끝을 경험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이라크도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의 끝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미 행정부의 관리들은 이라크가 민주화되면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화를 크게 촉진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올 여름 유엔개발계획(UNDP)은 한 보고서를 냈다. 필자들은 대부분 아랍학자들이었고 9·11 이전에 쓰인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아랍권이 선진국들을 따라잡으려면 정치개혁, 여성해방, 학문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랍의 지식인들도 '역사의 끝'을 원한다는 얘기다.

빈 라덴이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이 패배할 수 있다. 부시 행정부는 민주적 가치를 위해 싸운다면서 적지 않게 그같은 가치들을 훼손했다. 엄청난 도·감청을 자행했고 국외추방 청문회도 비공개로 유지하고 있다. 용의자들을 무단 억류한 데다 변호사 선임권도 무시했다. 의회도 맞장구를 쳐댄다. 민주적 가치들을 지키겠다고 앞장서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일부 법원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신문도 비슷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역사의 끝에서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의 끝은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우리는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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