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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고이즈미 訪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리스크가 높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본 정부 관리의 말이다(요미우리신문). 한반도사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놀라고 당황하게 만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의 북한방문 결정은 큰 리스크를 안은 정치적인 결단이다. 그의 머리모양과 가끔 상궤(常軌)를 벗어나는 행동이 상징하는 '고이즈미 스타일'이 아니면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북한이 아니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따르는 리스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고이즈미가 일본 국내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이다. 일본의 민심은 고이즈미·김정일(金正日)회담의 성공 기준을 무엇보다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에 두고 있다. 일본은 북한이 1970,80년대에 일본인들을 납치해 남한에 침투시킬 간첩들에게 일본말과 일본식 매너를 훈련시켰다는 혐의를 두고 그 일본인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를 부인해 왔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두 나라 실무진들이 가진 물밑접촉에서 북한은 납치된 일본인들을 찾아보자고 한발 물러섰다. 그래서 일본은 정상들이 만나 정치적 빅딜을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북·일 정상회담에서 납치됐다는 일본인들의 귀국이 성사되지 않으면 고이즈미 총리는 정치적으로 큰 곤경에 처한다.

둘째, 국제적인 리스크다. 가령 정상회담에서 金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문제에서는 통 큰 양보를 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자. 그러나 金위원장이 핵과 미사일은 미국과 논의할 문제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고이즈미 총리는 이번 북한 방문이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의욕과는 달리 일본문제만 해결하는 꼴이 된다.

미국 국무부는 이런 논평을 했다. "일본은 미국이 관심을 갖는 사항들을 잘 알고 있다. 북·일 정상회담에서는 당연히 그런 지식이 반영될 것이다." 이 말은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은근하고 무거운 압력이다. 일본인 납치문제만 해결하면 일본은 자국(自國)이기주의만 좇는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공산주의체제 붕괴 이후 북한의 생존전략은 핵과 미사일 중심이다. 1994년 제네바 핵합의는 핵을 통한 벼랑끝 외교의 큰 승리다. 군부의 반대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북한이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지 않고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북한은 미국만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이즈미 총리는 최소한 북한이 핵·미사일문제를 해결할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확인해 부시 대통령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2000년 가을 조명록(趙明祿)이 클린턴 정부에 제시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에서 확인한 방식일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포기를 경제지원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이라크사태를 분수령으로 보는 견해에도 문제가 있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결정론적인 사고다. 그러나 북한과 이라크는 다르다. 남한의 존재다. 94년 핵위기 때 클린턴 정부는 북한에 대한 미사일공격 문턱까지 갔다. 그때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반대는 맹렬했다. 미국의 북한 공격은 남한에도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일 수 있다. 부시 정부의 정책이 아무리 강경해도 한국과 주변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공격할 만큼 무모할까.

고이즈미 총리가 金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북·미 협상에서 최종적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는 핵·미사일 논의를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성과라 하겠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문제에 관한 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보다 고이즈미 총리를 더 신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이 잘 되면 북한이 일본에서 받아내겠다는 50억 내지 1백억달러의 배상은 북한의 경제개혁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만한 큰 액수다. 그렇다고 북한의 화해 제스처를 단기이득을 노린 평화공세로만 볼 수는 없다. 북한이 대화자세로 나오는 것은 장기적인 경제개혁 및 생존전략과 관계된다고 생각된다.

북·일관계가 뚫리면 한반도에서 일본의 발언권이 너무 커진다는 것도 기우다. 그런 걱정은 한국이 팔짱을 끼고 있을 때만 통한다. 북한이 한국·일본·미국을 상대로 유연한 자세로 나오는 것은 고무적인 변화다. 고이즈미 방북이 그런 변화를 살려 부시의 강경노선 완화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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