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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 5초 발사” 조교 말에 “Run” 외치며 우르르 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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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3일 경기도 양주시 비룡교육대 연병장. “전방에 함성 5초간 발사!” 훈련조교가 구령을 외치자 연병장에 도열한 86명의 재미동포 학생들 사이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해를 못한 학생들이 웅성대자 조교는 “못 들었습니까?”라고 재우쳐 물었다. 학생 한 명이 “런(Run!)”이라고 속삭이자 학생들은 일제히 연병장 반대편까지 우르르 뛰어갔다가 돌아왔다. 황당한 표정의 조교가 “목소리를 크게 5초간 지르란 말입니다”라며 혼냈다. 한국말을 조금 알아듣는 학생이 “스크리밍 포 파이브 세컨즈(screaming for 5 seconds)”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조선형(15)양은 “ ‘경례’나 ‘차렷’ ‘열중 쉬엇’ 같은 구령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며 웃었다.

한국을 찾은 재미동포 2세 학생들이 23일 병영체험을 위해 경기도 양주의 25사단을 찾아 대포를 직접 조작해 보고 있다. 휴전선에서 15㎞ 떨어진 이곳에서 학생들은 무기를 만져보고 유격훈련을 받으며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 느꼈다. [고려대학교 제공]

재미동포 2세 학생들이 한국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뿌리교육재단이 주최하고 고려대가 후원하는 ‘재미동포 청소년 모국연수’ 프로그램이다. 그중 ‘병영체험’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학생들이 분단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학생들 사이에선 병영 체험이 전통가옥 체험, 판소리 공연 관람 등 다른 활동보다 인기가 높았다.

1박2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생들은 군인처럼 유격훈련도 받았다. ‘양팔 벌려 뛰기’부터 바닥에 누워 다리를 세운 채 좌우로 흔드는 ‘온몸 비틀기’, ‘쪼그려 뛰기’까지 쉴 새 없는 훈련에 군복은 땀과 흙탕물 범벅이 됐다. 일부 학생들은 배와 다리에 통증을 호소했지만 낙오자는 없었다. 뉴욕에서 온 주지환(16)군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힘든 훈련을 견디며 나라를 지킨다는 점이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말했다.

저녁 시간엔 분단 현실에 대한 교육도 이뤄졌다. 6·25전쟁에 대한 교육과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창설된 684부대를 그린 영화 ‘실미도’를 봤다. 한솔(16)양은 “같은 한국인끼리 60년 동안 총을 겨누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양은 다음 날 승전관망대에서 한국전 당시 쓰던 포탄과 지뢰를 보자 숙연해졌다. 영어 자막으로 상영된 영화 ‘실미도’에서 버스에 탄 주인공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육승아(16)양은 “우리는 같은 사람인데 동족끼리 죽이는 장면이 너무 슬펐다”고 했다. 학생들은 간간이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북한과 2㎞ 떨어진 GOP의 승관전망대를 찾기도 했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북한땅을 바라보며 “영화 ‘실미도’에서 북한 무장간첩(김신조 부대)이 넘어온 길이 이곳이냐”고 묻는 학생도 있었다.

뉴욕에서 온 정현택(17)군은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평소에 부모님이 한국 군에 입대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며 “전방에 오니 꼭 입대해 나라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문화가 낯선 학생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됐다. 공동목욕탕 문화가 처음이라 부끄러웠던 학생들은 수영복을 입고 샤워를 했다. 여학생은 비키니를 입고, 남학생들은 반바지를 입고 진흙과 땀을 씻어냈다. 음식도 입에 잘 맞지 않았다. 첫날 나온 비빔밥은 맵다며 고추장을 덜어내고 먹기도 했다.

박안수 뿌리교육재단 회장은 “재미동포 학생들이 미국문화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지만 그래도 경주 불국사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하는 한국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청와대와 통일전망대·전주 한옥마을 등을 둘러본 뒤 오는 30일 프로그램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한길 기자 , 고태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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