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국>'개발 우선'에 헐리는 전통 가옥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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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렇게 낡은 것을 뒀다 뭐하겠어요. 빨리 헐고 새 집을 지어야죠."

베이징(北京) 남쪽 첸먼(前門)거리에 사는 리미야(李米亞·42)는 지금 살고 있는 전통방식의 주택 사합원(四合院)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불평이 대단하다. 부엌도 형편 없고, 세탁기를 들여놓고 쓸 만한 하수시설도 돼 있지 않단다. 그래서 하루빨리 헐어버리고 새 집을 짓는 게 꿈이다.

"여기가 다 잔디밭으로 바뀐대요. 그래야지요. 여기 집들 다 못써요. 너무 오래됐고, 새 가전제품을 들여 놓을 수도 없거든요."

시내 서쪽에 위치한 푸싱먼(復興門)거리 일대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이곳의 전통 주택가에 살고 있는 리진펑(李金鳳·64)할머니는 집을 헐어내고 새 집을 짓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대뜸 "철거한다고? 대찬성이지"라고 대답했다.

베이징엔 요즘 철거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명(明)·청(淸)시대 황궁의 창고로 쓰였다가 주택이 들어섰던 자금성(紫禁城) 부근 난츠쯔(南池子)도 이미 헐렸다. 그 자리엔 지금 공원이 번듯하다.

급격히 사라져 가는 오래된 건물, 고풍스런 골목길에 아쉬움을 갖는 사람도 많다. 현대식 멋쟁이보다 8백년 고도(古都)의 풍취를 더 높게 쳐주는 사람들이다.

"전통주택 사합원과 사합원을 끼고 도는 골목인 후퉁(胡同)이 없으면 베이징의 운치는 사라지고 맙니다. 이건 거의 재앙이지요." 베이징에 4대째 사는 '진짜 베이징 토박이'(老北京)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운전기사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베이징의 멋은 도심 곳곳을 휘감아도는 후퉁과 반듯한 네모 형태로 지어진 단아한 사합원을 빼놓고는 얘기하기 어렵다. 골목 하나, 사합원 한채마다 담긴 사연은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게 없다.

철거 통고장이 나붙은 푸싱먼 거리 남쪽은 원래 말을 훈련시키던 순마소(馴馬所)와 대장장이(鐵匠)골목이 있던 곳이었다. 청대 왕자의 저택과 이슬람교사원 터만 남겨놓고 푸싱먼의 역사들은 불도저의 굉음 아래로 깔리게 된다. 대신 푸른 잔디밭과 높이 45m 이하의 현대식 빌딩이 들어설 예정이다.

베이징의 모습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반부터다.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목 아래 베이징 도심을 둘러싼 각종 성벽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교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그 많던 성루(城樓)도 모두 사라졌다.

옛 자취들이 속속 스러지는 것을 일부 언론은 '재난'이라고까지 표현했다. 한 문화사학자는 아예 '베이징 말살론'을 제기했다. 후퉁과 사합원은 베이징을 이루는 '세포'나 마찬가지이므로 이를 없애는 것은 곧 고도 베이징 자체를 없애는 것이라는 경고다.

다른 학자는 "경제를 위해서라도 옛것은 지켜야 한다. 나중에 이것들은 공장 수백채로도 벌어들일 수 없는 돈을 중국에 가져다 줄테니까"라고 호소했다. 78년 시작된 개혁·개방 이후 줄곧 "개발 제일"만 외쳐온 중국 지도자들이 한번쯤 귀기울일 만한 충고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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