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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정부청사엔 재무부와 보험사가 섞여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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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호 30면

1971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디즈니월드 테마파크가 들어섰을 때, 월트 디즈니(Walter Disney)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디즈니의 측근들이 개장식에 참석한 디즈니 여사에게 그의 부재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전하자, 디즈니 여사는 “월트는 죽기 전에 이미 디즈니 월드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측은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우진의 캐나다 통신

월트 디즈니. 시골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동물 스케치를 놀이 삼아 하며 자랐고, 만화영화가 오늘날의 애니메이션으로 승화되기까지 그 초석을 다졌으며, 디즈니랜드 왕국을 통해 그의 꿈을 실현한 사람이다. 그의 삶은 ‘세계 최고의 영화 제작자가 되겠다’는 비전의 실천 그 자체였다. 열린 사고방식은 그에게 많은 사업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과정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도 서슴지 않았다. 디즈니 월드가 그의 사후에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파트너십 철학 때문으로 보인다.
비전은 확신을 통해 구체화된다. “나는 꿈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닥쳐오는 여러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용기 있게 비전을 실천한다.” 월트 디즈니가 생전에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다. 그는 비전을 가졌고 그 비전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았다.

우리나라 금융 부문의 비전은 ‘금융강국(金融强國)’이다. ‘금융이 강한 나라’의 모습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기저에 흐르는 정신은 바뀔 턱이 없다. 금융을 통해 부가 축적되고 금융을 통해 부가 분배된다. 문제는 금융강국으로 가기 위한 우리의 원칙 또는 이를 구현할 방법론의 부재다. 리더들의 현재 모습에서 우리 금융의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금융리더는 누구인가. 공무원, 전문가, 언론이나 시민단체 등과 같은 감시자(watch dog), 금융회사 경영진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믿을 수 있는가. 금융리더들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다. 리더와 팔로어(follower) 간 신뢰의 연결고리가 약할 대로 약해진 상태다.

금융 부문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배구조(governance structure)를 확실히 해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누가 그 역할(role)을 수행하고 또 책임(responsibility)을 질 것인가를 정하는 작업이 비전 달성을 위한 방법론의 핵심이다. 누가 역할을 수행하는지 모르는 회색지대(grey zone)가 존재하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 발생했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금융의 미래는 어둡다.

네덜란드의 행정수도 헤이그. 그곳에는 우리나라 과천 정부청사처럼 정부부처가 모여 있다. 재미난 사실은 재무부 건물 맞은편에 글로벌보험회사인 악사(AXA)를 비롯해 여러 금융회사가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관료들은 시장의 장사꾼들과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고 의견을 교환한다. 어제까지 서로 직장동료였던 경우가 허다하니 같이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주어진 역할과 책임이 명확하므로 공사(公私) 구분이 헷갈릴 이유도 없다. 금융감독원과 증권회사들은 여의도에 모여 있다.

그러나 이들 직원 간에 대놓고 만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남의 눈에 띌세라 전전긍긍이다. 얼마 전에 하나은행 지점장 출신이 기업은행 지점장으로 옮긴 사건이 화제가 됐다. 그게 우리나라 금융의 현실이다. 하나의 해결책으로, 리더들 간의 상호교류를 활발히 함으로써 순혈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이 있다. 이를 통해 사고의 스케일을 키우고 유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금융 부문의 비전 달성을 위한 철학은 수요자 중심이어야 한다. 고객, 또는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내서 이를 충족시켜 줘야 한다. 월트 디즈니는 1955년 디즈니랜드 개장식에서 “디즈니랜드를 찾아온 모든 사람은 우리가 초대한 손님”이라며, 일찍부터 고객만족(customer satisfaction)의 정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 걸었다. 캐나다는 상속세가 없다. 따라서 기업의 대물림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간편하다. 그렇다고 부의 세습을 용인하는 것도 아니다. 상속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순간, 그 비율만큼 소득으로 간주해 소득세를 부가한다. 상속인은 자신의 지급여력에 맞추어 일정 기간 동안 상속을 받는다. 물론 상속이 완료될 때까지 재산권(property right)은 보호받게 된다. 이처럼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각 주체에게 ‘그들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제도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청와대 조직이 개편되고 사람도 바뀌는 중이다. 지방선거도 끝났으니 금융 부문의 밀린 과제들 또한 수면 위로 하나 둘씩 떠오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금융의 현재 모습에 대해 회의적이다. 현재가 미래를 미리 비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이를 불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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