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9회-3>불패신화現代의좌절: 정몽헌측, 부실投信 놓고 경제팀과 "네탓"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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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현대투자신탁은 현재 자기자본을 전부 까먹고도 모자라는 돈(자본잠식분)이 모두 1조2천억원입니다."

2000년 4월 중순, 정기승 당시 금융감독원 증권감독국장으로부터 현대투신 현황 보고를 받던 이용근 당시 금융감독위원장(현 한국앤더슨그룹 고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현대쪽에선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외자를 유치하거나 갖고 있는 채권들을 팔아 연말까지 이를 해소하겠다는 겁니다. 대신 정부가 한국투신이나 대한투신처럼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현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긁어내시오. 담보가 될 수 있는 걸 다 내놓으라고 하세요. 그런 다음에야 정부 지원을 얘기해도 할 수 있다고."

이용근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정부 지원을 요청하기에 앞서 정몽헌(MH)당시 현대그룹 회장 등 현대 일가가 비상장 주식 등 사재를 털어 먼저 현대투신의 자금난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정부 지원부터 집요하게 요구했다. 현대와 경제관료들 간에 깊은 골이 파이기 시작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2000년 초 현대투신의 유동성에 약간 문제가 생겼다. 그때 그냥 현대가 알아서 처리했으면 큰 탈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현대는 정부를 걸고 넘어졌다. 현대투신의 자금난은 과거 정부 요청에 따라 부실금융기관인 국민투신·한남투신을 인수하면서부터 비롯된 것이니 정부가 당연히 부실을 메워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 이런 논리를 온갖 곳에 얘기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게 역으로 현대투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만 광고한 셈이 됐다. 李회장은 경제쪽뿐 아니라 정부내 다른 라인에도 그런 주장을 해서 경제관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정부와 현대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는 동안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1999년 말 1,000 포인트였던 주가는 대우사태 여파로 2000년 들어 연일 급락, 4월이 되자 더욱 떨어졌다. 4일 코스닥 200선이 무너진 데 이어 17일 종합주가지수는 하루 만에 사상최대인 93.17포인트가 폭락, 707.72로 주저앉았다.

증시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고, 투신사 위기설이 증폭됐다. 대우채권을 대량 사들였다가 99년 대우사태로 크게 손실을 입은 현대투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4월 25일, 정부는 투신사에 4조~5조원의 공적자금을 지원하는 내용의 증시안정책을 서둘러 발표한다. 그러나 현대투신에 대한 지원은 일절 언급이 없었다.

이용근의 회고.

"5대 그룹 부실은 5대 그룹 스스로 해결하도록 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원칙이었다. 게다가 사기업인 현대투신에 공적자금을 지원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정부의 '현대 지원 불가'로 이튿날인 26일과 27일 현대그룹 주가는 일제히 폭락했다.현대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지만 여전히 정부지원을 요구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현대그룹 관계자의 증언.

"당시 이익치 회장은 '정부가 증권금융채권을 발행해 연 5% 수준으로 1조원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하고도 이를 어겼다'며 '정부에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재출연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李회장의 생각이었다."

4월 28일, 이창식 당시 현대투신 사장은 이같은 입장을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발표한다.

"정부가 증금채 발행을 통해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기만 하면 현대투신은 2002년 3월에는 정상화할 것이다. 또 현대투신은 오너가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가 없는 만큼 사재출연 계획이 없다."

즉각 정부의 대응이 한층 강경해졌다. 그때까지 물밑에서 이뤄지던 정부의 사재출연 요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익치와 당시 경제관료들 간 갈등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이익치 회장은 툭하면 청와대 관계자를 찾아 경제팀이 현대를 지나치게 빡빡하게 압박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런 얘기들을 주로 이기호 경제수석이 DJ에게 전달하면서 이번엔 청와대와 경제관료들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당시 이헌재 재경부 장관은 李회장이 청와대와 직거래를 한다며 괘씸해했다. 나중에 채권단과 정부가 현대그룹 자구 방안에 가신 그룹 퇴진을 명문화해 요구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기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현 청와대 경제노동복지특보)이 이례적으로 현대사태에 직접 개입하고 나섰다.

"현대전자·현대증권 등이 (현대투신에)유상증자를 하고 실권주가 생길 경우 이를 대주주가 인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5월 1일·청와대 기자 간담회)

이기호가 사재 출자의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하며 현대를 다그친 것이다.

다음 날인 2일, 이번엔 DJ가 국무회의에서 지원사격에 나섰다.

"최근 투신사에 대한 지원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정부는 안전하고 투명한 대책을 세워 이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하며, 정부는 재계에 확실한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5월 3일, 이기호는 이헌재를 제치고 직접 재정경제부 출입기자들과 예정에 없던 오찬간담회를 갖고 다시 현대 해법을 내놓는다.

"현대투신 자본 잠식분 1조2천억원은 비상장 주식을 현물로 출자하는 방법 등을 통해 현대 오너들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

이날 오전까지도 사재출연은 없다며 버티던 현대측이 마침내 손을 들었다. 현대는 3일 오후부터 구체적인 출자규모를 놓고 정부와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현대 구조조정본부는 5백억원 규모의 사재출자를 포함한 정상화 방안을 언론에 흘렸다. 오후 8시쯤 주무부서인 금감위는 "그 정도로는 안된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MH가 직접 이용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용근:그런 정도로는 시장이 납득 못합니다. 연내에 1조2천억원을 확실히 메울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합니다. 자꾸 정부를 상대하려고 하지 말고 시장을 납득시키세요.

정몽헌:아시다시피 그룹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것 중엔 현찰 될 만한 게 없습니다. 내놓을 것이 비상장 주식뿐인데 팔 수가 없어 방법이 없습니다.

이용근: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니 알아서 하십시오.(비상장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이 지나면 시장이 더 이상 참지 못할 것입니다.

정몽헌:알겠습니다.

4일 새벽.

밤새 고심하던 현대는 MH와 MH계열사가 가진 비상장 주식을 담보로 내놓겠다고 금감위 실무진에 통보했다. 화끈한 사재출연을 기대했던 정부의 바람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금감위 관계자의 회고.

"현대는 MH 소유 주식을 담보로만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걸 사재출자하라고 요구했다. 또 담보금액도 크게 늘리도록 했다. 현대는 8천억원어치만 내놓겠다고 했으나 정부는 1조6천억원어치는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4일 오전 8시쯤, MH는 마침내 금감위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다.

MH 명의의 현대정보기술과 현대택배 주식 등 비상장 주식 1천억원어치를 현대투신에 현물 출자하고, 현대전자·현대상선 등 현대계열사가 가진 현대택배·현대정보기술·현대오토넷 등의 주식 1조7천억원어치를 현대투신에 담보로 맡기는 자구안을 내놓은 것이다.

어렵사리 한시름 돌린 현대투신은 극적인 반전을 모색한다.

주인공은 이번에도 이익치였다.

단신으로 뉴욕에 날아간 이익치는 6월 22일 미국 보험회사인 AIG와 윌버 로스 컨소시엄측이 현대증권·현대투신에 8억달러(약 9천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한다.

그러나 이 발표를 지켜보는 정부 관계자들의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5월 초 현대투신이 내놓은 정상화 계획 중 외자유치는 2천억원이었다. 그런데 이익치 회장이 불과 한달 만에 8억달러를 유치했다고 하니 잘 믿어지지 않았다. 외자유치를 빌미로 정부지원을 요청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 李회장을 놔두고는 현대 구조조정이 안되겠다는 게 당시 경제팀의 생각이었다."

이익치를 겨냥한 정부·채권단의 공세가 거세졌다.

이연수 당시 외환은행 부행장의 회고.

"5월 말께부터 거론됐던 가신그룹 퇴진 요구는 사실 이익치가 표적이었다."

그러나 이익치 압박의 선봉을 맡았던 이헌재 장관과 이용근 금감위원장은 두달여 뒤인 8월 7일 개각으로 나란히 경질됐다.

다시 이용근의 회고.

"재벌의 힘이 그렇게 무서운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와 李장관의 경질에 현대 입김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익치 자신도 무사할 수만은 없었다. 경제팀이 바뀐 뒤에도 계속되는 정부의 퇴진 압력에 시달리던 이익치는 8월 30일 결국 물러난다.

이익치가 사퇴하면서 현대투신의 외자유치도 꼬였다. 2000년 말 정부는 이익치 없는 현대투신을 대신해 AIG와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정부측 협상 실무책임자였던 진동수 당시 금감위 상임위원의 회고.

"AIG는 현대투신 인수 조건으로 정부 지원을 요구했다. 어차피 당시 부실화한 현대투신을 처리하려면 막대한 공적자금이 들어갈 판이었다. 그럴바에야 정부가 직접 AIG와 협상을 벌이는 게 현대투신을 살리는 데도, 공적자금을 덜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정부가 직접 나선 속사정은 또 있다.

이우철 당시 금감위 감독정책2국장의 회고.

"현대와 AIG는 자기들끼리 양해각서를 맺으면서 정부 지원을 받아낸다는 조항을 정부와 상의도 없이 넣었다. 98년 한남투신 인수 때 정부가 지원했던 2조원의 증금채 만기 연장과 이자율 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증금채는 무기명으로 발행한 것이어서 만기를 연장하려면 금융실명법을 바꿔야 할 판이었다. 그러자 AIG측에서 직접 정부에 협상을 제안해왔다."

2001년 1월 29일, 정부와 AIG측은 현대투신의 자산부족분 2조원 중(자본금 8천억원, 자본잠식 1조2천억원) AIG가 1조1천억원, 정부가 9천억원을 부담하는 기본 골격에 합의하고 구체적 협상을 시작한다. 이로써 현대투신은 더이상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됐다.

정부와의 협상은 AIG측의 끊임없는 요구로 갖은 진통을 겪다 해를 넘겨 결국 2002년 1월 19일 공식 결렬됐다.

익명을 요구한 현대그룹 관계자의 회고.

"현대그룹 해체의 시작은 현대투신이었지만 결정타는 모기업 현대건설이었다. 현대건설의 자금난은 곧바로 MH의 현대그룹 해체로 이어졌다."

◇ 'DJ노믹스… '는 다음주부터 '중앙경제'로 옮겨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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