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꾸는 '디자인 철학' 예술의전당 '유럽인의 새로운 선택'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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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지난 5월 5일부터 12일까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전시관에서 열린 '유럽인의 생활양식'전은 그 앞서가는 모습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다. 개막일 관람객수만 1만여명이 넘었을 만큼 일반인들 호응도 컸다.

영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11개국의 디자인 전공 대학생과 젊은 디자이너들이 신선한 상상력이 반짝이는 3백60여가지 프로젝트로 디자인의 힘과 꿈을 뽐냈다.

제목 그대로 유럽의 '생활 양식들(ways of life)'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몸·집·작업공간·네트워크·도시이동·지구·우주'의 일곱가지 주제로 살폈다. 유로 통화의 단일화를 이룬 2002년 첫머리에서 디자인으로 유럽 연합의 내일을 내다본 자리였던 셈이다. 프랑스 문화부가 발의해 이미 1999년부터 전시 준비에 들어갔다니 새 천년 새 유럽을 세우려는 유럽인들의 열망이 느껴진다.

이번 전시를 이끌어간 원동력은 유럽의 미술·디자인·미디어·교육 네트워크인 '큐뮬러스(Cumulus)'였다. 유럽의 60여개 관련 학교의 학장과 예술감독들로 이뤄진 '큐뮬러스'와 그 방대한 인적 그물망이 '유럽인의 생활양식'전을 가능케 했다.

90년 '큐뮬러스'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고 있는 유리오 소타마(헬싱키 UIAH 총장)는 "디자인은 문화를 응집하고 사회를 상징하는 집합적 코드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삶을 발전시키는 환경"이라며, "디자이너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문화적 지식과 복합적인 분야들을 통합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경영능력,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 끊임없는 학습 의지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은 이 방대한 전시작들 가운데 50여가지 프로젝트를 선별해 한국 디자인이 나갈 길을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달 6일부터 29일까지 서초동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는 '몸에서 우주까지-유럽인의 새로운 선택'전이다. 현장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지금 한국 디자인에 필요한 전시로 새롭게 기획한 김상규(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씨는 "유럽 각국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의 수준을 넘어 생활 속의 디자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꾸렸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중들에게 미래 삶의 시나리오를 시각적으로 제공해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를 민주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시물들은 한국형 디자인 전략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 진행을 도운 김난령(디지털 미디어 디자인 전공)씨는 "겉에 드러난 스타일보다는 그들의 디자인 개념과 전략을 꿰뚫어 살피는 것이 이 전시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덧붙였다. 02-580-1538.

정재숙 기자

'유럽의 선택展' 출품작들

1.시트 발리자(베른 도나데오 산스 외 1명, 스페인)

환경에 따라 자세를 바꾸는 수륙양용 운송수단이다. 물에 들어갈 때는 차의 전면부에서 휠이 내려오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모습이 된다. 이 곡선이 물과의 마찰을 줄여 주는 것. 육지에서 사륜구동이던 엔진은 수상용 추진기로도 쓰인다. 땅에서는 조용하고, 수중에서는 스포티하고 공격적인 두 모습의 자동차다.

2.시소 벤치(즈벤 아베드릭 외 2명, 독일)

시소와 벤치를 연결한 '커뮤니케이션 촉진 시설물'. 넘어지지 않고 이 의자에 앉으려면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앉고, 동시에 일어서야 한다. 한 사람이 일어나면 시소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21세기 유럽 공동체를 이런 한 마음으로 해나가자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도시에 널려있는 흔한 공공 기물이 휴식과 재미와 깨달음을 한꺼번에 주는 신선한 공간으로 변했다.

3.스크린(레네 노르펠트 이베르센, 덴마크)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는 강도에 따라 빛이 발사되고 스크린에 글씨가 뜬다. 그 글자는 막의 앞과 뒤에서 스펠링의 순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관찰자가 몸을 움직이면서 보고 느끼는 힘을 서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해 통찰력을 더 예리하게 만들어주는 아이디어다.

4.유혹하는 초콜릿(율리아 쿤켈, 독일)

인체의 아름다움과 감성, 그 부드러움과 촉각을 초콜릿의 재질과 연결시킨 기발한 제품. 몸의 각 부분을 초콜릿으로 떠내 먹는 이로 하여금 만지고 냄새 맡고 핥고 깨물며 몸에 연결된 감정들을 일깨우도록 만든다. 초콜릿이 '몸의 퍼즐'이자, '감정의 연결고리'가 되는 셈이다. 발표되자마자 여러 제과업체와 초콜릿 제조업체로부터 상품화 제안이 들어왔고, 소량 생산돼 독일의 몇몇 갤러리에서 팔렸다.

'살 만한 세상' '좀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애쓰는 디자이너들의 노력은 산업 디자인을 대중문화의 일부로 만들었다. 사용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디자이너의 시도들이 사람들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사용의 미학'을 낳았다. 소비문화의 심장부에서 사회적으로 보다 유익한 목적을 위해 스스로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금 전세계 디자이너들의 손끝에서 '신나는 사물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다음달 6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는 '몸에서 우주까지-유럽인의 새로운 선택'전을 지면으로 먼저 만나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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