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 피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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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도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바다는 두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1989년 5월, 50여일 간의 항해 끝에 옹진 근처 서해안에 도착했던 베트남 난민의 얘기다. 어쨌든 살아 남은 이들은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베트남전쟁이 월맹군의 승리로 끝난 것은 75년 4월 30일. 20세기의 지성 사르트르가 "인간의 도덕성을 시험한 전쟁"으로 규정했던 전쟁답게 베트남전은 종전 후에도 참혹한 상처를 남겼다. 무수한 사람들이 공산정권의 보복을 피해 한줌 조각배나 뗏목에 몸을 싣고 무작정 바다로 나갔다. 그들이 '보트 피플(boat people)'의 원조(元祖)였다.

국제 난민문제를 다루는 유엔고등판무관실(UNHCR) 통계에 따르면 월남 패망 이후 92년 말까지 동남아 지역으로 탈출한 보트 피플은 총 79만3천여명에 달했다.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는 거의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나라에서 난민 인정조차 받지 못한 채 불법입국자나 불법체류자로 떠돌았다. 그나마 육지를 밟아보지 못하고 바다에서 굶어 죽거나 해적들에게 희생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보트 피플은 한국에도 왔다. 참전국으로 베트남 난민을 외면할 수 없었던 정부는 부산에 난민보호소를 운영했다. 77년 9월 우리 상선이 남중국해에서 구조한 22명을 시작으로 16년 간 1천2백여명이 보호소를 거쳐 미국·뉴질랜드 등으로 갔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보트 피플의 행렬을 종식시킨 일등공신은 단연 베트남 정권의 '도이모이(쇄신)'정책이었다. 공산당 정권은 86년부터 실패한 계획경제 대신 시장경제를 과감히 수용하는 개혁·개방 정책으로 선회했다. 경제에 활력이 살아나고, 이 정도면 살 만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보트 피플은 사라졌다. 9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귀국하는 난민들이 늘고 있다.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은 열배 가량, 50달러를 밑돌던 1인당 소득은 4백달러선으로 늘어났다. 결국 베트남 정권의 결자해지(結者解之)가 보트 피플의 비극을 끝낸 것이다.

이틀 전 21명의 북한 주민이 20t짜리 목선을 타고 귀순해왔다. 97년 5월 김원형씨 가족 이후 5년 만에 재연된 북한판 보트 피플이다. 이 순간에도 대륙을 떠도는 탈북자들과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감안하면 언제 보트 피플이 동·서해 바다를 메울지 불안하기만 하다. 베트남의 해법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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