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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주부 '이유없는 일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려다 무릎을 다친 여인에게 한 젊은 남자가 접근해 자신의 아파트로 가 상처를 치료하자고 한다.

그리고,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길고도 끈적한 불륜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나인 하프 위크''위험한 정사' 등에서 특유의 감각적이고 에로틱한 영상으로 1980년대 영화 팬들을 사로잡았던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신작 '언페이스풀'은 '배우자에게 도덕적으로 불성실한(unfaithful)'이라는 뜻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불륜에서 빚어지는 치정극을 다룬 영화다.

결혼 11년째에 접어든 코니(다이언 레인)는 외견상 남부러울 것이 별로 없는 행복한 주부다. 뉴욕 교외에 자리잡은 번듯한 집,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는 사업가 남편(리처드 기어),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 그리고 마흔이 가까워 오지만 처진 엉덩이나 튀어나온 뱃살과는 거리가 먼 괜찮은 외모를 지닌 자신까지. 그러나 한올 한올 섬세하게 잘 짜여진 최고급 옷감 같던 그녀의 일상은 어느날 프랑스 청년 마텔(올리비에 마르티네스)과 격정에 휘말린 뒤부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찢어지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페이스풀'은 지극히 보수적인 시선을 지닌 영화다. 이 영화는 중산층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여느 할리우드 영화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코니가 처한 일상적 상황이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도입부에서부터 눈치챌 수 있다.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는 소위 '불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최소한 일탈의 이유는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코니의 동인(動因)은 그녀가 가정으로 복귀를 결심하는 이유처럼 우연적이고 즉흥적이다.

이런 이유 탓인지 관객들은 그녀의 심리 속으로 성큼 다가갈 수 없다. '코튼 클럽''스트리트 오브 파이어' 등에서 일찍이 명성을 날린 베테랑 배우답게 다이언 레인은 금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짜릿함과 일말의 도덕 의식이 환기시키는 죄책감 등 두 가지 빛깔의 감정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소화해내지만, 동일화의 감정까지 이끌어내는 데는 아무래도 영화의 힘이 달린다. 게다가 아내의 부정을 눈치챈 코니의 남편이 마텔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대목에 이르면 영화는 심리극과 스릴러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다 길을 잃어버렸다는 인상마저 풍긴다.

에로 영화의 수작이라고들 하는 '나인 하프 위크'식의 아슬아슬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건 단 한 장면, 마텔의 아파트에서 마텔이 코니의 손가락을 잡고 점자책을 짚는 대목 정도다. 라인 감독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아쉬움이 많다. 23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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