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관·정치권 등거액 소송 줄이어-'언론 길들이기' 악용 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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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최근 정치권에서 언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다.

한나라당이 한 기명 칼럼을 문제 삼아 한겨레신문사에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데 이어 시사월간지인 『신동아』 기사와 관련해서도 동아일보사에 같은 액수의 소송을 냈다. 청와대를 비롯해 여당인 민주당 및 국정홍보처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경우 청와대를 포함해 정치권 및 개인이 낸 손해배상 소송이 20건을 넘고 청구 금액도 60여억원에 이른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아니지만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한 중재신청 건수도 급증하고 있다.

언론중재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청와대·여야 정당·검찰 등 국가기관 및 정치권에서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 중재를 신청한 건수는 노태우 정부 때 56건이던 것이 김영삼 정부 때는 1백23건으로 늘었고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는 다시 두배 이상으로 증가한 2백85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에 대한 중재 및 소송이 급증하는 현상에 대해 순천향대 장호순 교수는 크게 두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현 정권이 과거 정권보다 언론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것. 즉 명예훼손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으로 '언론을 겁줘서' 권력에 대한 언론의 비판기능을 약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고 시민의 법치주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언론의 횡포에 맞서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한 결과로 풀이하고 있다.

문제는 명예훼손제도가 개인의 명예훼손에 대한 구제제도로 활용되기보다 청와대·정부·정당 등 정치권력이 언론의 비판 기능을 봉쇄하는 수단으로 남용하는 데 있다. 많은 기자의 경우 정치 권력이나 공권력이 자신의 기사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 신청을 하면 심리적인 위축을 느끼기 쉬운데, 법원 소송까지 갈 경우에는 현실적인 제약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유럽의 경우 공적인 보도와 관련된 소송에서는 허위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그것을 입증할 책임이 있으나 한국은 보도하는 언론이 해당 기사가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판결에서 언론사가 불리한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허위임을 입증하는 것보다 진실임을 입증하는 것이 휠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배금자 변호사는 "민주주의가 덜 발달된 나라일수록 명예훼손 관련법은 공직자에 대한 공개적인 논란과 정당한 비판을 막는 수단으로 남용돼 왔다"면서 "영·미 법에서는 정부기관의 명예훼손 소송을 금하는 판례가 오래 전부터 확립돼 왔다"고 소개했다.

강원일 변호사는 "언론 스스로 자성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언론의 자유가 조금 방임되거나 오용되더라도 언론자유는 보호돼야 한다"면서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때 파생되는 부작용이 언론자유를 보장해서 생기는 부작용보다 훨신 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건행 변호사는 "언론과 정치권력의 소송은 대부분 중간에 흐지부지되고마는 경향이 있다"면서 "언론 규범과 판례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소송이 끝가지 가 많은 판례를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언론인협회(IPI)는 2000년 발표한 세계 언론자유 연례 보고서에서 "한국에서 언론에 대한 위협 수단으로 명예훼손이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택환 미디어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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