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융합시대한국이갈길은>공학·의학 등 '학문의 벽' 허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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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4면

휴대전화 하나에도 전자공학뿐 아니라 금속공학·전파공학·화공학·언어학까지 필요하다. 다양한 학문과 기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상품이 나올 수 없는 시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는 이런 기술융합 시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은 학과라는 장벽에, 정부조직은 부처 이기주의에 막혀 시너지 효과를 내기가 어렵다. 이에 기술융합 시대의 문제와 대안을 찾아본다.

편집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뇌과학연구센터 윤효운 박사는 정상인을 대상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환상을 재현하는 연구를 이제 막 시작했다. 생물학을 전공한 윤박사는 이 연구에 생물학뿐 아니라 의학·컴퓨터공학·수학·심리학까지 어우러져야 성공적으로 연구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뇌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의학이, 영상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컴퓨터공학이, 환상의 양상을 특정 틀 안에서 정형화하려면 수학이 필요하다. 심리학은 실험 대상자의 심리가 환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연구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따라 윤박사는 관련 학문 전공자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서로 별개로 여겼던 학문의 벽이 급속히 허물어지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현상 중 하나의 사례다. 이를테면 기술융합이다.

광학기기의 대표적 상품인 카메라도 더 이상 광학기기만으로 보기 어렵다. 디지털 카메라뿐 아니라 일반 카메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전자공학·컴퓨터공학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점을 자동으로 맞추고, 햇빛을 등지고 있는 피사체를 적당히 밝게 찍어주며, 눈동자에 붉은 점이 맺히는 것을 자동으로 없애주는 것들은 모두 컴퓨터 공학이 만들어내는 '요술'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더하다. 비닐 같은 필름을 대용량 반도체가 대신하고, 영상을 처리하는 소프트웨어가 들어가 있다.

카메라를 만드는데도 기계공학·광학공학·전자공학·컴퓨터공학 등 다양한 학문이 결합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올 수 없다. 이미 기술융합이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학 교육·정부 조직·연구소 등은 아직 기술융합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조황희 박사는 "선진 각국의 교육시스템이나 산업 현장에서는 학문의 벽이 급격하게 허물어지고 있는 데 우리나라는 아직 전근대적인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다"며 "기술융합 시대에 맞게 각종 체계를 속히 고치지 않으면 장기적인 발전에 어려움이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박사는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로 ▶다(多)학제 위주로 대학 교육 개편▶정부 조직 개편▶연구소간 공동 연구 활성화▶프로젝트 관리자 양성 등을 꼽았다.

◇대학 교육 개편=우리나라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 의과대학에 가서 강의를 들으면 학점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학과마다 울타리를 쳐놓고 다른 단과대학에 가서 강의를 듣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료기기 중 전자공학을 응용하지 않는 것이 드문데도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학과간·단과대학간에 높은 벽을 쳐놓고 있다.

학과 이기주의 탓이다. 자기 학과의 과목을 듣는 학생이 적어지면 그만큼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여러 학과간에 공통으로 필요한 과목도 각 과에서 별도의 교수를 채용한다. 화학의 경우 화학과의 교수가 화공과에 가서 강의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학과의 예산이며, 교내 힘겨루기에서 그만큼 밀리기 때문이라는 것이 교수들의 설명이다.

KAIST 의과학센터 유욱준 교수는 "대학의 학과를 없애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교수나 학생들이 연관된 두개 과 이상에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학생의 경우 부전공으로 다른 과에 적을 두는 것이 아니며, 교수도 똑같은 지위로 두개 과에 적을 두자는 것이다. 그래야 학과간·학문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기술융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학제간의 개편도 시급한 과제다. 지금은 공학계열이나 의학계열 등으로 학제를 도입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즉 같은 학제 안에 있는 학과끼리는 학점을 인정하는 제도다. 그러나 학부과정에 아직 이런 학제 체제를 도입한 대학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일부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에 도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과학기술부 정윤 연구개발국장은 "이공계뿐 아니라 인문계까지도 서로 학점이 인정되는 다학제제도가 빨리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조직 개편=정부 부처의 연구개발 관리를 하나로 묶어 통합 관리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과학기술부·보건복지부·산업자원부·정보통신부 등 부처별로 수천억원씩의 연구비를 쓰지만 계획에서부터 관리 자체가 제각각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김형오 위원장은 "각 부처의 연구개발 기능을 총괄할 조직이 필요하다. 현재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있지만 '통과 위원회'격이다. 기술융합 시대에 걸맞게 과학기술 조직도 대폭 수술을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출연 연구소간 공동 연구 활성화=현재 우리나라는 10여개의 정부출연 연구소가 있다. 그러나 연구소간 교류나 공동연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서로 자기 영역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조황희 박사는 "연구원들의 소속은 그대로 두되 프로젝트별로 인력을 운영하면 기술간의 단락 현상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같은 조직으로는 연구소간·학문간 벽을 허물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박방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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