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라져가는 동네 이발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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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해 말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용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있다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도가 나오자 미국 내 많은 이발사들은 낙담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어떻게 그 나라 출신에게 머리를 맡기느냐는 불만이 아니었다. 대통령만큼은 남자 이발사를 이용해온 전통이 마침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미용사가 깎아주니 스타일이 더 자연스럽다"는 부시의 말에 일부 이발사들은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미국 남성들이 이발소 대신 미용실을 찾는 세태는 1970년대에 시작됐다. 거리마다 가득한 헤어살롱·헤어숍은 이제 남녀노소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대표적 생활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반면에 적·청·백색의 표시등이 돌아가는 바버숍(이발소)은 지방 중소도시라면 모를까 대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래픽 참조>

수소문 끝에 버지니아 스프링필드 95번 고속도로변 한적한 곳에 위치한 '밥스 바버숍'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꽤 오랜 만인 면도거품 냄새가 코에 들이닥친다. 뒤로 한껏 제쳐지는 빨간색 쿠션의 코시상표 의자들, 한국이발소로 치자면 밀레의 '만종(晩鐘)'그림 격일 듯한 싸구려 수채화 액자들이 차례로 눈에 띄고, 한쪽 구석엔 빨래판처럼 생긴 꼬마손님용 팔걸이 받침대까지 놓여 있다.

"장발머리의 비틀스가 영국에서 건너온 뒤로 이발소 장사가 잘 안되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에는 사내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나둘 미장원에 가는 거야. 그게 다 여자들이 남자들 길들이는 것인데."

40년째 이곳에서 이발소를 운영한다는 로버트 스탁턴(59)은 '미국에서 이발소가 왜 줄고 있느냐'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성을 높였다. 그는 "20년 전까지 이 동네에 이발소가 모두 열네곳이 있었지만 그 사이 열곳이 문을 닫았다.

어떤 이는 헤어숍으로 재개업했지만 나는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단골손님들도 많고, 다행히 이 지역엔 미용실을 꺼리는 베트남·중국 등 동양계 이민자 남성들이 많아 현상유지는 된다"고 말했다.

10년째 단골이라는 존 허버트는 "적어도 20달러쯤 하는 미용실보다 값도 싸고(이곳은 12달러), 면도도 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곳에 오면 옛적에 아버지가 다른 손님들과 노래도 부르고 왁자지껄하게 정치이야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대기의자에서 가제트 형사 만화를 보던 추억들이 생각나 좋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내 이발소는 약 8천곳으로 70년대초의 4분의1 수준이다. 갈수록 숫자가 줄어드는 추세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의미를 지닌 장소다. 실제로 남성4중창(이발소와 같은 단어인 바버숍으로 불림)음악은 1880년대 흑인 이발소에서 시작됐으며, 60년대에는 플레이보이지 정기구독의 절반을 이발소가 차지했을 정도로 남성만의 휴식공간이자 동네 여론형성·정치토론의 장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우스캐롤라이나·웨스트버지니아·미시시피 등 미국 내 많은 주·카운티 정부들은 수년 전부터 관광상품 차원에서 유서깊은 이발소들이 문을 닫지 않도록, 각종 홍보·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USA 투데이지는 매년 여름휴가철이면 '전국의 가볼 만한 10개 이발소'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스탁턴은 "올해 9월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전국 이용업총회 때 이발소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며 "하지만 나는 한사람의 손님이라도 있으면 이발소 문을 닫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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