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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癌요? 생각도 안해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마지막 무대라는 생각으로 섰던 1997년 KBS방송의 '빅쇼' 이후로 제 음반을 찾는 팬들이 많아졌어요. 제가 가수라는 사실을 뒤늦게 아셨던 거죠. 그런데 모두 LP판이라 저 자신도 구하기 힘들어 안타까웠어요."

라디오 DJ와 MC로 더 유명한 '소중한 사람'의 가수 길은정(41)이 10년 만에 가요 앨범을 내놓았다. '길은정 노래시집-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베스트 음반이다. 특유의 맑고 애잔한 목소리로 노래와 애송시를 번갈아 가며 두 장의 CD에 담았다. '헤어진 후에' 등 새 노래도 세 곡 실었다. 미니 책자 같은 부록엔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글과 사진, 그리고 일기 등이 담겨 있다.

3년째 라디오방송 진행

"지금쯤 제 삶을 한번 정리해 두어야겠다는 비장한 심정에서 시작한 일이기도 해요. 암환자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지만 사실 언제 갑자기 쓰러질지 모르잖아요."

열살 때부터 기타를 쳤다는 그는 84년 '소중한 사람'으로 데뷔했다. 92년까지 석 장의 독집 앨범을 내며 가수로서 꾸준히 활동해 '한국의 올리비아 뉴턴 존'이란 찬사도 받았다. 또 '가요 톱 10''뽀뽀뽀''정오의 희망곡' 등 많은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95년엔 시 낭송 앨범도 석 장 발표했다. 그러다 96년 갑자기 대장 선암 2기 선고를 받았다. 수술 후 보름 만에 퇴원해 방송을 했을 정도로 투지를 보였지만 방송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에서 잠시 요양 생활을 했다. 가수 편승엽과의 결혼과 이혼은 이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그는 편씨와의 과거에 대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려 잊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길씨는 소리소문도 없이 컴백, 벌써 3년째 불교 FM방송에서 '108가요'를 진행하고 있다.

암은 완전히 나은 것이냐고 물었다. "몰라요. 97년 항암치료를 거부한 이후론 병원 정기검진도 안 받고 있어요. 건강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집착하지 않으니까 특별히 아픈 걸 모르겠어요. 물론 규칙적인 생활 등 기본은 지키죠."

그는 자신의 방송 활동 재개를 보고 암환자와 가족들의 문의가 잇따르자 2년 전 『내가 행복하게 사는 이유』라는 암 투병기도 펴냈다. '길은정 행복 카페'(cafe.daum.net/lovegyj)란 인터넷 카페를 열고 열심히 상담도 해줬다.

그 사이 '소중한 사람들'이란 팬클럽이 생겼다. 이들이 지난해 1월 1일 선물해준 홈페이지(www.kileunjung.co.kr)는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를 항용할 정도인 그에게 세상과의 유일한 대화통로나 다름없다.

"매일매일 내가 느낀 점이나 했던 일들을 솔직하게 일기처럼 적고 있어요. 전 원래 사람들하고 쉽게 사귀지 못하는 성격이라 친구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공주같이 군다고 방송계에서 '왕따'도 많이 당했죠."

오디오북 제작에도 열성

뛰어난 방송 진행자로서 그의 말솜씨를 생각하면 의외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혼자 노는 게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그 때 읽은 많은 책은 방송 활동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단다. '귀로 듣는 책'인 오디오북 제작에 열심인 것도 독서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올해 초 『길은정의 이솝우화』 『길은정의 안데르센 동화』를 내놓은 데 이어 요즘은 어른들을 위한 『책상은 책상이다』를 녹음하고 있다.

"앞으론 라이브 공연도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팬들에게 문학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 노래들을 들려 주고 싶어요."

삶의 벼랑 끝에 섰던 그이기에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사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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