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프트 파워 소프트 코리아] 2. 새 3D = 디자인·DNA·디지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무조건 구겨 넣으세요!"

MP3 플레이어 시장의 판도는 이 한마디로 확 바뀌었다. '꼬리'이던 디자인이 '몸통'인 첨단기술을 밀치고 주연배우로 떠오른 것이다. 2002년 여름 아이리버라는 제품을 만들던 레인콤은 큰 벽에 부딪쳤다. 협력사인 이노디자인이 내놓은 새 디자인이 생소한 삼각 기둥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픽 크게 보기>

'MP3 플레이어=네모반듯'이라는 기존 공식을 과감히 깨는 것이었다. 당장 엔지니어들은 "도저히 부품이 안 들어간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MP3 플레이어는 기계가 아닌 '패션'이라는 게 경영진의 믿음이었다. 결국 "회로를 종잇장처럼 구겨 넣어서라도 완성하라"는 불도저식 명령이 떨어졌다. 결과는 어땠을까. 내부 구조는 완전히 달라졌고, 톡톡 튀는 스타일에 젊은이들의 지갑이 열렸다. 자극받은 경쟁사 제품들의 디자인도 바뀌기 시작했다. 시장을 선도하는 '아이리버 스타일'이 창출된 것이다.

이제 '첫째는 기술, 둘째도 기술'이라는 구호는 옛말이 되고 있다. 디자인에 맞춰 소재를 고르고 부품도 개발한다. '소프트(soft)'한 디자인이 '하드(hard)'한 기술을 이끄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인기 높은 일제 올림푸스 카메라를 보자. 불쑥 튀어나온 줌 렌즈는 주머니에 넣을 때 항상 거치적거리는 골칫덩이였다. 그래서 구상한 게 렌즈를 아예 안으로 쏙 밀어넣고 문을 만드는 개폐식(슬라이딩식) 디자인이었다. 전원 접지부나 덮개를 만들 때 새 기술이 도입됐음은 물론이다.

하드와 소프트의 이 같은 무게중심 이동은 '시장'이 스스로 찾은 해법이다. 기술 수준이 빠르게 평준화하면서 뭔가 남다른 것을 찾던 기업들은 자연스레 디자인을 생존 무기로 택했다. 소비자들도 고만고만한 가격과 기능 대신 이미지와 브랜드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적으로 '디자인 대전(大戰)'에 불이 붙었지만 MP3 플레이어 같은 첨단 제품 쪽에선 한국이 맘껏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휴대전화가 좋은 예다. 서울 중구 순화동의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청업자 같았던 이곳 디자이너들은 이제 제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적극 참여한다. 유려한 외양에 힘입어 핀란드 노키아의 안방인 유럽 시장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1000만대가 팔린 '인테나폰(안테나가 안에 있는)'도 디자이너들이 먼저 창안한 작품이었다. 경영센터 정국현 전무는 "디자인이 게임의 룰을 바꾼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다른 동네가 호락호락하진 않다. '소니 스타일'이 대표하는 일본의 경박단소(輕薄短小)형 디자인, '로열(Royal.왕실)' 이미지를 파는 디자인 강국 덴마크, 공학이 결합된 영국의 디자인 등 저만치 앞선 나라가 많다.

무엇보다 디자인은 기술개발과 비교해 투자 효과가 평균 19배나 크다(영국 디자인위원회). 그만큼 국가.기업 간 싸움도 치열하다. "디자인하라, 아니면 사직하라(Design, or resign)!"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외침도 이런 절박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국디자인진흥원에 따르면 전반적인 한국 디자인은 중국.대만보다 앞서지만 미국.프랑스 같은 선발국과 비교하면 80% 수준에 그친다. 300조원으로 추정되는 세계 디자인 시장도 미국.영국.일본.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의 잔치판이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 장사'다. 한국은 1년에 3만6000명의 디자이너를 배출한다(산업자원부.2002년 기준). 일본의 2만8000명, 이탈리아의 2만명보다 많다. 양적인 면에선 1급이다.

그러나 영세한 회사가 많고, 마케팅.엔지니어링과 엮어 '디자인 경영'을 할 수 있는 고급 맨파워가 없어 질적으로 떨어지는 게 문제다.

다만 긍정적인 신호는 '소프트 마인드'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도 2008년까지 세계 7위(현재 12위)의 디자인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계획을 최근 마련했다.

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