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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노동자, 지진해일에 묻힌 고향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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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 스리랑카 노동자 페마 랄이 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기에 앞서 한국인 친구와 인사를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3일 오후 3시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스리랑카 출신의 노동자 10여명이 로비 한쪽에서 조촐한 '환송식'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 체류 중인 300여명의 스리랑카 친구 중 20여명만 본국의 가족들과 연락이 되고, 나머지는 지진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되자 이들의 대표 격인 페마 랄(34)이 '총대'를 멘 것이다.

한국에 온 지 7년8개월 된 랄은 불법 체류자 신분이어서 이번에 출국할 경우 재입국이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본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는 데다 가족들과의 연락이 끊겨 도저히 한국에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랄은 눈물만 글썽이며 친구들과 차례로 포옹을 했다. 마사드(27)가 부모님과 조카 등에게 쓴 편지를 랄에게 전달하면서 흐느끼자 다른 동료들의 눈도 금세 붉어졌다. 그러나 제대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랄은 "고향으로 가게 됐지만 마음은 너무나 답답하다"고 말했다. 랄은 부모님, 20일 결혼식을 앞둔 남동생과의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친구 대부분이 가족과의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차례로 다니면서 안부를 확인할 것입니다."

랄은 친구들이 전해 준 편지와 연락처 등을 갖고 골.마타라.당갈라.한반토르 순으로 스리랑카 남부를 다닐 예정이다.

이들이 전달한 편지만도 수십통이다. 랄은 일일이 확인작업을 한 뒤 한국에 있는 동료들에게 결과를 전달할 계획이다.

랄의 7년 친구로 마중나온 근로복지공단 보험급여국장 백만종(55)씨는 "이들도 우리나라를 위해 일해왔던 친구들인데 다시 못 들어 올 수도 있어 너무 안타깝다"며 "어떻게든 한국 정부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랄이 입은 회색 양복은 석달 전 다른 스리랑카 친구들이 '우리 대표'라며 마련해준 것이었다.

"받아야 하는 월급을 못 받아 화가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도와주시는 것 보고 한국인들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를 같이 걱정해 줘 고맙습니다."

스리랑카 노동자들의 모임 대표인 랄은 '코리안 드림'의 꿈을 접은 채 이날 오후 4시20분 비행기로 폐허로 변해버린 고향으로 떠났다.

한편 법무부는 지진 피해국가 출신의 불법 체류자가 가족의 생사 확인 등을 위해 출국할 경우 범칙금을 면제하고 입국을 규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랄이 재입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 셈이다.

백일현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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