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충돌 막자"예상밖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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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일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간 제13차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교전과 같은 적대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공동 노력키로 합의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경의선 철도·도로 건설공사를 위한 합의서를 서명·비준하기 위해 열린 제12차 회담을 제외하곤 단 한번도 합의를 도출해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회담에서 양측이 합의한 것은 원론적 수준에 불과하다. 서해상에서의 '긴장 완화'와 '오해 방지'에 협력키로 한 게 사실상 전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양측이 대화로 해결하기 위해 장성급 회담을 지속하자고 뜻을 같이한 것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서해상에서의 남북간 무력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최초의 디딤돌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회담에서 북측이 과거와 달리 유엔사와 남측의 강경한 기조발언을 경청하는 등 시종일관 부드러운 회담 태도를 보인 것도 앞으로 있을 장성급 회담의 전망을 밝게 한다. 1998년 잠수정 침투사건과 99년 연평해전 직후 벌어진 장성급 회담에서 정치선전식 '억지 주장'만 되풀이하던 과거 북측의 회담 태도와는 판이하기 때문이다.

회담에 참석한 이정석(廷奭·준장) 합참 군사정보차장은 "회담 분위기가 대단히 좋았다"면서 "또한 양측이 언제든지 만나 대화로 해결하자고 의견을 같이했기 때문에 장성급 회담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솔리건 유엔사 대표도 1시간50분간에 걸친 회담을 마치고 밝은 표정으로 회담장을 나와 자유의 집 1층 로비에서 성명을 발표하면서 "회담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북측이 회담에서 긍정적 입장을 보인 것은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 진전에 대한 북한 정권의 기대감이 담겨 있다는 게 남북관계에 정통한 군 고위 당국자의 설명이다.

그는 "북측의 무력도발을 항의하기 위해 열린 장성급 회담에서 북한군이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라면서 "이는 12일부터 있을 남북 장관급 회담을 비롯해 북·미대화 등을 염두에 둔 사전포석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공사 및 금강산관광 활성화 등을 논의하기 위해 조만간 시작될 남북 군사당국간 회담도 이번 장성급 회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 북측으로부터 서해교전과 관련해 명시적인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은 남한 보수층의 반발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2일부터 4일까지 금강산에서 열린 제7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에서 북측은 전통문에서 밝힌 수준 외의 어떤 사과 표명도 하지 않아 이번 장성급 회담에서는 구체적인 사과의사를 밝힐 것으로 기대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군사정보차장은 "북측이 직접적인 사과발언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북측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찬복 북측 대표가 기조발언을 통해 "서해상 무력충돌의 원인은 명확한 해상 경계선이 없어서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의가 필요하다"고 밝힌 게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유엔사와 국방부는 NLL 문제를 장성급 회담 의제로 올리지 않겠다는 방침을 확고히 하고 있어 진통이 예상된다.

유엔사는 "서해상에서 새로운 해상 경계선을 설정하는 문제는 남북 간에 논의할 사안"이라는 입장이고, 국방부는 "NLL 철폐를 비롯한 새로운 해상 경계선은 남북 군사적 신뢰구축 과정에서 국민의 공감을 얻어가며 논의할 문제"라고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장성급 회담에서는 북한 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NLL 문제를 제외한 서해상에서의 군사적 충돌방지 대책 등 신뢰구축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이번 회담에서 양측은 무력충돌 방지 방안을 제시했다"면서 "앞으로 양측은 검토과정을 거친 뒤 실무회담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가 되면 장성급 회담을 다시 열어 구체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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