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가 앗아간 여행의 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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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무시무시한 전율, 전례가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공포'.

공포 영화의 광고 카피 같은 이 말은 독일의 시인 하이네가 1843년 기차를 처음 보고 했던 말이다. 지금이야 일상적인 교통수단이 됐지만 1825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철도가 건설됐을 때 당시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시벨부시는 그의 저서 『철도 여행의 역사』에서 철도가 19세기 유럽인의 일상과 의식·문화·심리 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선 철도는 사람들의 여행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흙 냄새를 맡아가며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었던 마차 여행의 여유로움은 사라졌다. '총알처럼' 빠른 기차는 주변의 풍광을 살롱에 걸린 그림처럼 그저 스쳐지나가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철도는 출발시간을 지켜야 하고 역 안에서 기차를 기다리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요했다.

시벨부시의 통찰력은 '과학이 여행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나라에 경인선 철도가 처음 들어선 것은 1899년. 그러니까 우리나라 철도 역사도 1백년을 넘어섰지만, 유럽의 철도 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이나 독서·낮잠 때문에 무시되는 창 밖의 풍경들, 여행 과정은 사라지고 목적지만 남게 된 철도 여행은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앞으로 과학의 발전은 사람들의 놀이문화를 더욱 개인적이고 은밀한 형태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여행을 즐기는 대신 여행 기억을 뇌 속에 주입할지도 모르며, 축구나 야구를 하는 대신 사이버 스포츠 게임에 열중할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풍경을 즐기고 온몸으로 공간을 체험하라며 '걷기 예찬'을 설파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주장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의 경험을 떠올려본다. 비행기가 구름 사이를 지나 바다를 건너는 동안, 그리고 착륙할 공항을 향해 도시의 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동안 우리는 누구나 자연의 경이로움에 압도된다. 도시는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소박할 정도로 작고 도로의 차들은 줄지어 선 개미들마냥 안쓰럽기까지 하다.

바둥거리며 살아온 내 삶의 터전이 이 거대한 지구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은 내 삶을 되돌아볼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과학의 발전은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새로운 것을 선사하기도 한다. 우리의 여가생활·놀이문화가 과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것이 '인간의 모습'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온전히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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