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 대재앙 … 스리랑카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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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 골(Galle)시에서 취재 중인 천인성 기자

지진해일이 덮친 지 1주일째인 1일 오후(현지시간) 스리랑카 남부 골(Galle)시. 스리랑카 최고의 휴양도시라는 명성은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돌멩이처럼 널브러져 있는 시신과 이들이 내뿜는 코를 찌르는 악취, 앰뷸런스의 사이렌이 2005년의 시작을 함께할 뿐이었다. 겨우 형체만 남은 건물에는 희생자를 애도하는 하얀 깃발이 나부꼈다.

기자는 지난해 12월 30일 국제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와 함께 항공기편으로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 도착했다. 이어 31일 육로로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114㎞ 떨어진 인구 11만의 골로 이동했다. 골은 이번 해일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이다. 차로 2~3시간 걸리던 거리는 지진해일로 흙더미가 쌓이고 도로가 파손돼 7시간이나 소요됐다. 골이 가까워지면서 진흙 속에 반쯤 파묻힌 시신과 폐허가 된 건물들이 스쳐갔지만 마침내 도착한 골의 풍경은 예상보다 끔찍했다.

임시 시체안치소로 쓰이고 있는 스리랑카 최대의 골 크리켓경기장. 시체들을 실어나르는 트랙터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시신 5~8구를 실은 트랙터가 진흙탕 길을 움직일 때마다 시신들은 짐짝처럼 흔들렸다. 가족의 시신이라도 찾겠다는 기대를 걸고 1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부패가 심해 시신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자 허탈하게 발길을 돌렸다.

생존자들은 지금 굶주림과 전염병의 위협 등으로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 골시 공무원 시리말 페르난도는 "음식물 부족 사태가 계속되면 열흘 안에 더 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또 주민의 80%가 식수원으로 사용해온 우물은 썩은 쓰레기 등이 스며들면서 오염되고 있다. 현지 의사 자야와단은 "이재민 캠프마다 설사 환자가 늘고 있다"며 "우물물이 오염되면 장티푸스나 세균성 이질 등 전염병이 급속히 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6일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남아시아 지진.해일 피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에 참석해 이미 확정한 500만달러 외에 수천만달러 규모의 추가 지원 내역을 제시할 계획이다. 또 일본 5억달러, 미국 3억5000만달러, 영국 9600만달러 등 국제적인 지원도 잇따르고 있다.

골 시내의 건물 잔해 밑 진흙밭 속에는 아직도 시신들이 방치돼 있었다. 1일 오후(현지시간) 현지를 취재 중이던 기자는 발밑에서 물컹한 느낌을 받자마자 고개를 돌려야 했다. 발에 밟힌 처참한 시신의 모습에 놀란 데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한 남성이 가족의 시신인지를 확인하려고 다가섰다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코를 막으며 되돌아왔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대화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도시에 어둠이 깔리면 치안 상태가 악화된다. 구호단체 관계자나 현지를 취재하는 기자 등 외국인이 나타나면 "워터(물)" "머니(돈)" 등의 어눌한 영어를 외치며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수십명의 주민들이 순식간에 둘러싼다. 스리랑카 정부는 이곳의 치안 유지를 위해 경찰 이외에 육.해군 병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약탈 등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어렵사리 찾아간 임시 이재민 수용소인 시내 성(聖) 마리아 성당 옆 가스파트 초등학교에는 3000여명이 대피해 있었다. 교실의 마룻바닥에는 허기에 지친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뒤엉켜 구호의 손길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교실을 가로지른 빨랫줄엔 남루한 옷가지 몇 벌이 걸려 있었다. 폐허뿐인 집터에서 가져온 전 재산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40대 초반의 푸스파(여)는 이번 해일로 5, 6세의 두 딸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은 큰딸(10)의 상처를 쳐다보며 "약이 없다"고 울부짖었다. 딸의 상처는 이미 곪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집이 완전히 쓰러졌다"며 "남은 아이들을 먹여살릴 수도 없을 것 같다"며 흐느꼈다.

스리랑카 정부는 정확한 이재민 숫자조차 집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골 전역에는 현재 1000~5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이재민 캠프가 30곳이나 넘게 생겼다. 100명 정도가 머무는 소규모 캠프는 부지기수였다. 마을주민 사먼(34)은 "도시의 절.성당.학교 건물 모두가 이재민 캠프"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골 지역엔 식수, 코코넛.바나나 등 식량 대용품, 담요 등 구호품이 속속 도착하고 있지만 이재민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피해가 심한 지역일수록 도로망 등이 크게 파손돼 구호품 전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구호활동을 펴고 있는 현지인 외라싱헤 목사는 "지금 필요한 것은 쌀이 아니라 비스킷.빵과 아기들을 위한 우유"라며 "물이 없어 밥을 지을 수도 없어 당장 허기를 때우는 게 급하다"고 말했다.

자녀 등 가족을 구하지 못한 생존자들의 후유증도 계속되고 있다. 구호단체 굿네이버스의 의사 김주엽씨는 "이재민 중에 불면증.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으며 부모나 자식을 잃은 사람은 슬픔과 공포에 질려 정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골(스리랑카)=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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