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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톰 모리스, 150년 전 프로의 새벽을 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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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16면

올드 톰 모리스(왼쪽)와 그의 아들 영 톰. 둘은 디 오픈에서 8차례 우승했다. [중앙포토]

1860년 만들어진 디 오픈 챔피언십은 톰 모리스를 위한 대회였다. 신설 골프장인 프레스트윅에서 클럽 프로로 스카우트한 톰 모리스와 그가 만든 코스를 자랑하려고 대회를 만들었다. 톰 모리스는 첫 대회에서 준우승했으나 결국 4차례 우승했다. 1867년이 그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이듬해 톰 모리스는 2등을 했는데 우승자의 이름 역시 톰 모리스였다. 그의 아들이었다.

돌아온 메이저 골프대회의 계절 <4>최고의 역사 최고의 권위, 디 오픈

골프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에선 인류의 역사를 바꾼 발명가가 많이 나왔다. 증기 엔진의 제임스 와트와 페니실린의 알렉산더 플레밍 등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그러나 아이 이름을 지을 때 그들은 창의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다. 디 오픈 1회 우승자인 윌리 파크와 2회 우승자인 톰 모리스는 아들의 이름을 자신과 똑같이 지었다. 두 톰 모리스 모두 골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름이 같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골프계에선 아버지 모리스를 ‘올드 톰 모리스’, 아들 모리스를 ‘영 톰 모리스’라고 부른다.
올드 톰 때문에 대회가 생겼는데 아들 영 톰이 대회를 없앨 뻔했다. 그가 1868년부터 3년 연속 우승하면서 챔피언 벨트를 영구 보관하게 됐는데 클럽은 새로운 트로피 만들 돈을 내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71년엔 대회가 열리지 못했다. 곡절 끝에 1872년 열린 대회에서 영 톰은 또 우승했다. 4대회 연속 우승 기록이다. 톰 모리스들은 아직까지도 디 오픈의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대회 최고령 우승자는 만 46세 우승자인 올드 톰이고 최연소 우승자는 17세의 영 톰이다. 올드 톰이 1862년 13타 차 우승한 것이 역대 최다타수 차 우승이다. 영 톰은 12타 차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리스 부자는 고향인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린 오픈에선 우승하지 못했다. 올드코스에서 처음 오픈이 열린 1873년 영 톰의 5회 연속 우승이 유력했으나 컨디션이 나빴다.

19세기 골프 프로의 위상은 매우 낮았지만 올드 톰은 최고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아들이 젠틀맨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프로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캐디를 시키지 않고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아들은 골퍼가 되기를 원했다. 영 톰은 골프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데다 천부적인 실력도 있었다.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올드 톰은 2-2 매치 대결을 할 때 아들을 파트너로 데리고 다녔다.

영 톰은 키가 크고 남자다운 구레나룻에 어깨가 넓고 잘 생겼다. 학교를 다녀 매너도 좋았다. 스타 기질도 있었다. 올드 톰은 느리고 부드러운 스윙을 했지만 영 톰은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강한 스윙을 했다. 그의 스윙을 본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영 톰은 이전의 주정뱅이 프로들과는 다른 완벽한 패키지였다.

톰 웟슨

프로 골프의 새벽을 연 인물이고 19세에 오픈 3연패를 한, 요즘 말로는 아이돌 스타였다. ‘골프와 골퍼에 관한 책’을 쓴 해럴드 허친슨은 “많은 골퍼가 명멸했지만 영 톰의 인기만 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영 톰은 투어 프로의 원조이기도 했다. 골프 대회에 나가 번 상금만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산업혁명으로 기계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여가 시간이 생겼다. 기차 여행을 하게 됐고 바닷가 링크스에 와서 프로들의 골프 경기에 내기 돈을 걸고 즐겼다. 톰 모리스 부자에 대한 책 ‘토미스 아너’를 쓴 존 쿡은 “프로 골프는 이전까지의 레저인 당나귀 타기와 수영이 주지 못하는 드라마를 줬다”고 썼다. 젠틀맨 골퍼들은 그들의 클럽 챔피언십이 가장 중요한 이벤트라고 생각했지만 대중은 프로들이 보여주는 최고 수준의 경기에 매력을 느꼈다.

워낙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매치도 했다. 영 톰은 베스트볼로 대항하는 두 일급 프로와 대결했다. 상대는 둘이 각자 티샷을 하고 그중 좋은 곳에서 다시 두 명이 두 번째 샷을 했다. 웬만해서는 한 명이 이길 수 없는 경기다. 그래도 영 톰이 이겼다. 양궁 사수와 홀에 먼저 넣기 경기를 한 적도 있다. 활은 맞바람 속에서도 300야드를 간다. 벙커나 러프에 들어가도 페어웨이에서처럼 샷을 할 수 있다. 영 톰이 졌다. 그러나 완패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만큼 정교했다.

영 톰은 매치 상대를 존중하고 패배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뛰어난 인격을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반항도 했다. 당시 프로골퍼는 쉽게 말해 캐디였다. 캐디를 할 때 올드 톰은 무릎을 꿇고 흙을 모아 젠틀맨들의 티를 만들어줬다. 볼에 침을 묻힌 후 모래를 살짝 묻혀주기도 했다. 그러면 스핀이 잘 걸린다고 했다.

아들은 그걸 참지 못했다. 왜 저 사람들에게 굽실거려야 하느냐고 했다. 아버지는 “골퍼의 스윙 특성에 맞게 모래 티를 만들어주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나의 정신이 구부리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구부리는 것일 뿐”이라고도 했다. 영 톰은 현실에 순응하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그는 귀족에게 대들다 세인트 앤드루스 링크스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이 워낙 좋았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그를 영웅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했다.

결혼을 놓고도 부자는 신경전을 벌였다. 올드 톰은 스코틀랜드의 최고 스타로 성장하고 있는 아들을 귀족 집안의 규수와 결혼시키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은 귀족의 딸이 아니라 귀족 집에서 하녀를 하던 여자와 눈이 맞았다. 며느리는 아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동네 사람들이 “사생아를 낳은 여자”라고 쑤군대던 사람이었다.

둘이 한 팀으로 2-2 매치플레이 경기 중 영 톰의 부인이 출산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며느리와 신생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원망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영 톰은 두문불출했다. 오픈 챔피언십에도 나가지 않고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러던 그는 1875년 12월 잉글랜드에서 온 겁 없는 도전자 아서 몰리스워스의 12라운드 대결 제의를 받아들였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몸이 심각하게 축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몸을 돌보지 않았다. 경기는 눈보라 속에서 12월 8일까지 9일 계속됐다. 영 톰은 라운드당 핸디캡 6타를 주고서도 10홀 차로 이겼지만 몸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12월 24일 밤 그는 세상을 떴다. 부인이 세상을 뜬 후 16주 후였고 그의 나이 24세였다. 매우 검소했던 올드 톰은 아들의 장례에 당시로선 매우 큰 100파운드를 썼다. 챔피언의 장례를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올드 톰은 매우 건강했다. 한겨울에도 매일 새벽 북해의 바다에 알몸으로 뛰어 들어 수영을 했다. 그는 87세까지 살았다. 그러면서 세 아들과 부인, 딸을 묻어야 했다. 그는 아들이 숨을 거둔 지 33년이 지난 1908년 세상을 떴다. 장례식 때 세인트 앤드루스 전체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올드 코스 18번 홀의 이름은 톰 모리스다. 18번 홀 옆에는 그가 클럽을 만들었던 공방도 있다.

현재 세인트 앤드루스에는 또 한 명의 올드 톰, 톰 웟슨이 있다. 60세이던 지난해 디 오픈 우승을 할 뻔했던 그는 150년을 맞는 이번 오픈 챔피언십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링크스에서 경기하는 법을 아직 잊지 않았다”고 했다. 골프의 성인 바비 존스는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우승해야 진짜 챔피언”이라고 했는데 5차례 오픈 챔피언인 웟슨은 공교롭게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는 우승하지 못했다. 웟슨은 세인트 앤드루스에 올 때면 가끔 올드 톰의 무덤을 찾는다고 한다. 깊게 파인 그의 주름살 속에서 올드 톰의 모습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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