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아닌 즐거움, 그들에게는 맥주가 '신의 물방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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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22면

세계 맥주 전문점 와바(WA BAR) 이효복 대표/좋아 독일서 맥주 공부한 브루마스터 권경민/맥주 만들기 인터넷 동호회 총운영자 정영진

미국 맥주만 찾다 유럽·중국 맛에도 눈떠
세계 맥주 전문 주점 와바(WA BAR)의 이효복(43) 대표는 낮술을 많이 마신다. 매장에서 판매할 맥주 맛을 직접 보고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주량은 병맥주 2병 정도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진다. 13일 오전 11시 서울 강동구 길동 와바 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술을 잘 못하기 때문에 맥주 프렌차이즈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술을 잘 마셨으면 아예 다른 장사를 했거나 소주를 팔았을 걸요(웃음)”라고 말했다.2001년 1호 점을 연 이래 10년째 와바를 운영하고 있는(전국 305개 매장)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맥주 입맛이 계속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밀러’ 같은 미국 맥주가 절대 강자였어요. 매출 순위를 내면 10위 안에는 대부분 미국 맥주였죠. 당시 세계 맥주를 마시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이 유학이나 여행을 하면서 마셨던 추억의 맥주를 찾아 여기 왔는데 그때만 해도 미국의 비중이 컸던 모양이에요.”

맥주에 빠져 사는 사람들

2000년대 중반 이후엔 유럽이나 중국 맥주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대표는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의 교류 대상이 주로 미국이었는데 그때부터 유럽이나 중국 등으로 확대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곳으로 여행이나 유학도 많이 가고 사업도 늘어났잖아요. 우리나라 세계맥주 시장에 춘추전국시대가 온 것이죠”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2000년대 초반에는 매장에 가보면 테이블 위에 여러 종류의 맥주들이 한 병씩 놓여있었어요. 요즘은 한 종류의 맥주가 여러 병 쌓여있죠. 그만큼 사람들이 세계 맥주에 대해서 잘 알게 됐다는 거예요. 10년 전엔 호기심으로 여러 가지 맥주 맛을 봤다면 이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맥주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만 찾아요”라고 지난 10년간의 맥주 입맛 변화를 설명했다. 이 대표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양조장을 운영했다. 그는 어릴 적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양조장에서 소주를 만들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가 맥주 장사를 하는 것이 우연만은 아니에요.”

그는 와바를 창업하기 전 1990년대 중반부터 ‘웨스턴 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다. 당시 미국식 바의 인테리어는 대부분 외국의 것을 그대로 베껴왔다. 이 대표는 한국 실정에 맞는 인테리어를 시도해 이름을 알렸다. “외국 것을 그대로 가져오다 보니 우리나라에 잘 맞지 않았어요. 매장 안 탁자 높이만 해도 외국은 110㎝인데 우리나라 사람한테는 높거든요. 그래서 5㎝ 낮췄죠. 또 우리나라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는데 그걸 적당히 감출 수 있도록 매장 안 조명도 어둡게 했어요.” 웨스턴 바 인테리어를 하던 이 대표는 이후 직접 바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매장 간판 이름 한 글자 만드는데 40만~50만원이 들어갔다. 그래서 돈을 아끼려 글자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최소한 다섯 글자는 필요했는데 그걸 넘지 않는 선에서 ‘한번 와서 봐’라는 의미로 ‘와바(WA BAR)’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저한테 맥주는 술이기 전에 즐거움이에요. 앞으로도 사람들한테 맥주가 아니라 재미와 오락을 만들어주는 '분위기'를 팔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나만의 맛을 만드는 맛, 하우스맥주의 매력
브루마스터(brew master: 맥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제조 공정을 관리하는 사람) 권경민(32)씨는 대학 졸업 후 2002년 초 맥주를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갔다. 14일 오후 2시 서울 강서구 가양동 하우스맥주 주점 세븐브로이에서 만난 권씨에게 맥주를 공부하러 독일까지 간 이유를 물었다. 그는 “독일에 있을 때 맥주를 공부하러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사람들 모두 똑같이 이 질문을 했어요. 제 답은 너무 간단했고요. 술을 너무 좋아해서죠”라고 말했다. 주량이 소주 3병이라는 그는 한국에서 독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무렵 좋아하는 술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맥주의 본고장에 가서 제대로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에 가서 ‘이건 공부다’라는 생각으로 정말 수없이 맥주를 마셨어요. 독일 맥주만 100종류 넘게 마신 것 같아요. 그렇게 많은 종류의 맥주를 마셨는데도 맛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걸 골라 마시면서 공부한다는 게 행복했죠.”

종류도 많았지만 마시는 방법도 다양했다. “독일에선 맥주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마시기도 해요.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워낙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있다 보니 마시는 방법도 제각각이죠. 사람마다 맥주 마시는 방법도 다 다르고요.” 그는 1년의 어학 과정과 1년 반의 실습 과정을 거친 후 뮌헨 대학 맥주양조학과에 입학했다. 한 학년에 25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외국인은 3~4명 정도, 여자는 2명밖에 없었다. 권씨는“언어와 문화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어요. 게다가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간 거라 같은 반 친구들하고 나이 차이가 나는 문제도 쉽지 않았죠”라며 “하지만 맥주를 함께 만들고 마시면서, 역시 맥주를 통해 친구들하고 친해질 수 있었어요”라고 했다.

교육은 실습 위주로 진행됐다. 기초적인 화학·물리·열역학부터 맥주의 역사·제조법·포장법까지 맥주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다. 매 학기 맥주를 하나씩 만들어 학기말에 발표를 하고 평가하는 시간도 있었다. 귄씨는 “독일에선 ‘맥주 장인’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굉장히 인정을 해줘요. 소시지, 치즈 장인 같은 경우도 그렇고요”라며 “그런데 한국에 와 보니 ‘장인’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게 속상했어요”라고 말했다. 2008년 중순 한국에 돌아온 그는 맥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하우스맥주 주점에서 브루마스터로 일하며 바이젠·둔켈·라거 등의 맥주를 만들었다. 지금은 일을 쉬면서 자신의 가게를 열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그는 지난 10개월 동안 한국사람 입맛에 맞는 맥주 제조법을 개발하기 위해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다. 결국엔 자신만의 제조법을 완성해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다.

그는 “사실 한국맥주는 종류도 적고 개성이 없잖아요. 반면 하우스맥주는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어요. 그날의 날씨와 숙성 정도에 따라서 맛과 색깔도 조금씩 다르고요. 그런 변화를 찾아가는 게 하우스맥주만의 재미이자 매력이죠”라며 “하우스맥주가 비싸다고 하는데 대량 생산하는 맥주에 비해 소량 생산하기 때문에 가격이 조금 비쌀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맛을 가진 맥주인데,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맥주는 술이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맥주 만들기 동호회(cafe.daum.net/microbrewery)’에서는 매년 가을 회원들이 만든 맥주를 모아 그해 최고의 맥주를 뽑는다. 지난해 11월에는 20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해 30~40종류의 맥주를 심사했다. 1등을 한 회원에겐 맥주병 모양의 트로피와 상품이 주어진다. 지난해 최고의 맥주는 ‘띠굴’이란 아이디를 사용하는 회원이 만든 '페일 에일'이었다. 홉향이 강하고 에일 특유의 맛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2001년 만들어진 동호회는 집에서 맥주를 만들어 마신다는 것이 생소하던 시절 주로 외국에서 '홈 브루 맥주'(집에서 만든 맥주)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

현재 1만 4000여 명의 회원이 있다. 2~3개월마다 정규 모임을 열어 각자 집에서 만든 맥주를 가져와 시음하고 서로 평가한다. 동호회의 총운영자 정영진(36)씨는 맥주가 좋아 직업을 맥주 관련 업종으로 바꾼 사람이다. 집에서 맥주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수입해 판매하는 그를 15일 오후 3시 서울 송파구 가락동 회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직접 만든 맥주가 담긴 갈색 페트병이 군데군데 쌓여있는 사무실 안은 달콤한 냄새로 가득했다. 맥주를 만들고 있어 나는 냄새라고 했다. 둥그런 철제 용기를 이용해 보리와 따뜻한 물을 섞는 ‘당화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보리에서 당분을 빼는 과정이라 식혜 냄새가 강하게 났다. 정씨는 “이제 여기에 홉과 효모를 넣고 발효시켜야 하는데 완성되려면 4주 정도 걸려요. 맥주 담글 때마다 ‘잘 나와라~’ 하면서 기도해요”라고 말했다.

평소 맥주를 좋아하던 그는 어느 날 ‘이렇게 맛있는 맥주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고 맥주 만들기 동호회를 알게 됐다. 그러곤 순식간에 '홈 브루 맥주'에 확 빠졌다고 했다. “2002년에 처음으로 만든 맥주 맛은 잊을 수 없어요. 내가 직접 만들면 맛이 기가 막힐 줄 알았는데 막상 먹어보니, ‘한약도 아니고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 빨리 개봉해 마셔서 그랬던 거예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괜찮아졌죠.” 그는 맥주를 완성한 후 1~2주 정도 시간이 지나야 제맛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매번 빨리 맥주를 마시고 싶어 한 통 한 통 마시다 보면 정작 맛이 잘 들었을 때는 맥주가 얼마 남지 않는다고 했다.

집에서 맥주를 만들려면 장비와 재료비가 약 10만원에서 많게는 300~400만원까지 든다. 시간은 보통 4주에서 2달까지 걸린다. 30분 만에 완성할 수 있는 종류도 있다. 현재 정씨가 만들고 있는 맥주는 모두 6종류다. 그중 복분자 맥주도 있다. 그는 “다양한 맛을 찾다가 복분자를 찾았는데 복분자를 그대로 넣으면 향이 좋지 않아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을 하고 있어요”라고 했다.‘맥주는 굉장히 과학적인 술’이라는 정씨는 맥주 제조법을 개발할 때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pro mash’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재료별 투입량을 입력하면 완성될 맥주의 맛과 도수·색까지 예상 결과가 나온다.

“맛도 맛이지만 하우스맥주는 만드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는 놀이예요”라며 "나만의 제조법을 개발해 맛있는 맥주를 판다는 소문이 나는 맥줏집을 차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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