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직전 프레데리의 솔로, 숨이 막힐 듯 격정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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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05면

프랑스 출신 안무가 롤랑 프티는 대가급 현역 중 최고령에 속한다. 1924년생이니 올해 나이 86세다. 같은 프랑스 출신으로 그보다 3년 아래인 모리스 베자르와 함께 인생 자체가 20세기 발레 역사인 거장 가운데 한 명이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롤랑 프티의 밤’ 15~18일 서울 예술의전당

15일 그의 세 작품을 한데 모아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 ‘롤랑 프티의 밤’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지난해 타계한 독일 무용가 피나 바우슈가 그랬듯 안무가의 죽음은 작품의 생명력과 적잖은 연관성이 있다. 부모 잃은 자식들처럼 구심점을 잃게 되면 레퍼토리도 생기를 잃게 마련이다. 지난 3월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 바우슈의 ‘카페 뮐러’와 ‘봄의 제전’ 공연이 뭔가 허전했던 건 이 때문이다.

그의 생존 시기에 소개된 ‘롤랑 프티의 밤’은 바우슈 무용단의 직수입 내한 공연과 달리 국립발레단이 판권을 사와 단원들을 중심으로 만든 공연이다. 소위 ‘라이선스 뮤지컬’과 같은 제작 형태로, 한국 무용수가 출연한다고 해도 원작 안무가 그의 대리인들에 의해 철저히 관리된다는 점에서 오리지널과 진배없다. 방한하지 못한 롤랑 프티 대신 트레이너 루이지 보니노와 군무 트레이너 장-필립 알노가 이식수술을 집도했다.

공연은 그의 대표작인 ‘아를르의 여인’(1974년)과 ‘젊은이와 죽음’(1946년), ‘카르멘’(1949년) 순으로 진행됐다. 초연을 기점으로 치면 모두 30~60년이 넘는 오래된 작품이다. 세 작품 중 ‘카르멘’과 ‘아를르의 여인’은 각각 1978년과 1995년 한국에서 공연한 적이 있긴 하다.

롤랑 프티는 러시아 고전발레의 토대를 크게 허물지 않으면서 ‘소극적’ 혁신을 시도한 모던 발레 안무가다. 이런 점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운동장 발레’ 등 대담한 혁신을 주도한 모리스 베자르와 비교된다. 공교롭게 ‘프티’라는 성은 프랑스어로 ‘작다’는 의미인데, 이번 세 작품을 통해 고전발레에서 모던발레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롤랑 프티의 역할을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이번 세 작품의 공통 주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진한 사랑과 죽음, 곡예적인 춤, 이를 뒷받침하는 음악과 전위적인 형태의 무대 디자인이 강렬한 빛깔로 표출됐다. 롤랑 프티 발레의 공통점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비제(‘아를르의 여인’과 ‘카르멘’)와 바흐(‘젊은이와 죽음’)의 기존 음악에다 움직임을 입혔는데, 모두 느슨할 정도라도 일정한 플롯이 있어 춤 못지않게(아니 이보다 더) 무용수들의 연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도데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비제의 조곡을 활용한 ‘아를르의 여인’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두 남녀 프레데리(윤전일)와 비베트(김주원)의 사랑 이야기다. 반 고흐 풍의 그림을 배경으로 남자 주인공의 자살을 그렸다. 결혼식 전날 죽는 소설과 달리 둘은 결혼식을 치른다. 극중 실체를 보이지 않은 ‘아를르의 여인’은 둘을 죽음으로 갈라놓는 추상적인 망령으로 묘사했다.

매우 비감 어린 비제의 조곡을 통해 점차 감정의 상승을 촉발한 ‘아를르의 여인’은 남녀 주인공의 파드되(2인무)도 인상적이지만, 여러 남녀 무용수들이 일렬로 대형을 이뤄 손과 발로 다양한 움직임을 연출하는 코르드발레(군무)의 조화미가 훨씬 돋보였다. 자살 직전 프레데리 역 윤전일의 격정적인 솔로는 숨 막히는 압권이었다.

역시 죽음의 여인(윤혜진)과 대면하는 한 남자(이원철)의 몽환적 종말을 그린 ‘젊은이와 죽음’은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대본과 바흐의 ‘파사칼리아’ 음악을 빚은 20분짜리 소극이다.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작품이었다. 여인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던 남자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탁자와 의자를 상대로 춤을 추거나 탭댄스 리듬을 밟는 장면은 백미였다. 바리시니코프 주연의 영화 ‘백야’에서 차용돼 유명해진 바로 그 장면이다.

비극적 사랑과 죽음의 ‘3부작’은 마지막 ‘카르멘(45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도전적이며 도발적인 카르멘(김지영)과 그녀에 대한 사랑에 속아 인생을 망치는 돈 호세(김현웅)의 처절한 엇갈림이 긴박하게 전개됐다. 카르멘과 돈 호세가 파드되로 질척이는 술집 장면과 ‘아를르의 여인’의 조곡 중 미뉴엣을 활용한 침실 파드되는 음악과 움직임, 연기가 일체를 이루면서 웬만한 드라마 이상의 감동을 주었다. 짧은 치마가 달린 검은 색 코르셋으로 치장한 무희들의 의상도 파격적인 볼거리였다.

국립발레단은 클래식 발레에 안주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연기 등 표현력의 확장을 도모한 이번 모던 발레 실험이 성공적인 만큼 앞으로 한국 창작발레로의 적극적인 진군도 기대해 본다. 1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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