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롄 기타제작 콜텍社 김동식 사장:'使 하모니' 경영… 본사 생산성 추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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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어머니 편찮으신 건 다 나으셨어?"

"아들이 반에서 1등 했다며? 축하해."

"어제 소화약 먹었다는데 오늘은 어때?"

중국 다롄(大連·지도)에서 기타를 만드는 다롄 콜텍사(社)의 김동식(金東植·44)사장은 생산라인을 도는 아침 일과를 대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가족끼리의 대화나 진배없다. 직원들도 그를 외삼촌이나 이모부처럼 스스럼 없이 대한다. 사장과 직원이 서로 툭툭 치며 농담을 주고받는 건 예사다.

이건 회사를 운영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金사장은 '마음 얻기'를 경영철학 제1조로 삼고 있는 경영인이다.

악기는 마음으로 울린다. 지음(知音)이 곧 지기(知己)가 되는 이치다. 이 점에서 金사장이 기타를 만드는 것은 제격이다. 그는 기타에 앞서 중국인들의 마음을 먼저 울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기타가 아름다운 울림을 내듯 그는 작업장에서 중국인 직원들과 기분 좋은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이런 화음은 '심복신복(心服身服)'이란 그의 소신에서 나왔다. 마음을 얻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인들은 金사장의 소신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따져보고 앞뒤까지 다 재본 뒤에야 거래에 응하는 것이 중국인들이니까. 그런데도 '마음' 하나로 중국인 2백70명을 움직일 수 있을까.

金사장은 성과로 대답했다. 그는 1999년 5월 한국 콜텍사의 다롄 자회사 사장으로 임명돼 다롄 콜텍사를 세웠다. 한달 뒤 직원을 뽑고 그로부터 4개월 만인 10월, 첫 제품을 생산했다. 보통 기타 생산공장이라면 공장 설계와 기계 장착에만 족히 5개월은 걸린다. 따라서 첫 제품을, 그것도 제대로 된 제품을 4개월 만에 뽑아냈다는 건 놀랄 만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金사장은 아예 품질과 생산량에서 한국 본사를 추월해버렸다. 본사가 세계 3대 기타 제작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한국에서 기타 한대를 만드는데 5시간이 걸려요. 그러나 다롄 공장에서는 그보다 10분이 빠릅니다. 품질도 본사에 뒤지지 않아요."

대개의 한국 본사가 중국 내 자회사에 기대하는 수준은 '모든 면에서 한국의 70%'다. 그런데 자회사가 본사를 넘어섰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중국 내 동종 기업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타 제작업체는 평균 5백명의 직원을 고용해 매월 1만대의 기타를 만든다. 그러나 콜텍은 2백70명의 직원이 같은 양의 기타를 만들어낸다. 생산성이 거의 두 배라는 얘기다. 게다가 품질은 정상급이어서 외국 바이어들의 주문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다.

이 모두 직원들의 마음을 얻었기에 가능했다고 金사장은 믿고 있다. 그렇다면 金사장은 어떻게 직원들의 마음을 얻었을까. 현장을 보자.

金사장의 사무실 앞,그리고 공장 내 복도 이곳저곳에는 편지함이 마련돼 있다. 직원들이 金사장에게 띄우는 사연을 담는 통이다.

남편과 이혼한 여직원이 보내온 하소연, 실직한 동생에게 직업을 마련해 달라는 청탁,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떼를 쓰는, 어리광섞인 '협박장' 등 내용도 다양하다.

"모든 편지에 대답을 줍니다. 대답은 편지로 하는 경우도 있고, 직접 만나 얘기할 때도 있지요. 이렇게 대화를 하면 문제가 풀리는 건 물론이고, 저와 직원들 사이에 따뜻한 신뢰가 쌓이게 됩니다."

지난 3월에는 한 남자 직원이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입원비와 치료비가 2만위안(약 3백만원)이나 됐다. 그의 한달 봉급 1천위안으로는 어림도 없는 액수다. 그의 부모는 "집을 팔겠다"고 나섰다.

金사장은 말없이 병원을 찾아갔다. 그리곤 의사에게 "우선 치료비의 3분의1을 내가 내겠으니 빨리 수술해 달라"고 부탁했다. 金사장과 환자의 관계를 안 의사는 감동했다. 그 자리에서 수술을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나머지 비용을 마련해 보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직원들이 '거금'을 싸들고 온 것이다.

"'사장이 치료비를 상당부분 부담하고 나섰다'는 소문이 공장 안에 퍼지자 직원들이 호주머니에서 기름때 묻은 돈을 꺼내놓은 거지요. 모두들 어렵게 사는 형편이지만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목돈을 모았다고 해요. 명치끝이 묵직해지더군요."

물론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공장을 가동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늘 부드럽게 대하는 그가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종업원들이 어이없는 요구를 들고 나오는 일이 잦아졌다.

"한 직원을 다른 작업반으로 옮겼더니 친척들을 끌고와서 시위를 하더군요.'고소하겠다'고 협박도 했어요. 일부 작업반원들은 팀장의 일처리가 못마땅하다며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지요.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주변에서는 문제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충고했다. 계속 두어봤자 말썽만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 먼저 '버릇'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金사장은 '1대 1 설득 작전'을 택했다. 문제 인물을 일일이 만나 간곡하게 달랬다. 불만을 적극 수용하는 자세도 보여줬다. 그러자니 시간이 무한정 들어갔다. 그로부터 거의 1년 동안 金사장의 퇴근시간은 늘 오후 10시를 넘겼다. 낮에도 조용히 쉴 틈이 없었다.

결국 직원들이 감동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동료를 나무라는 사람도 생겼다.

이런 노력 외에도 金사장이 중국인들 속으로 깊게 파고들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 그가 뛰어난 중국통이라는 점이다.

그는 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다. 대만에서 3년간 유학한 뒤 영국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도 마쳤다. 92년 그가 영국에서 곧바로 베이징(北京)으로 날아와 투자컨설팅회사를 차린 것도 중국에 대한 그의 자신감과 무관치 않다.

그후 金사장은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자동차 자동설비회사를 맡아 6년간 운영하기도 했다.'준비된 최고경영자(CEO)'였던 셈이다.

그는 가끔 중국인들과 노래방에 들르면 중국 유명가수의 노래를 그 가수보다 더 멋지게 뽑아낸다. 중국어가 유창한 것은 물론이다.

"'당신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라고 늘 직원들에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기던 이들도 진심으로 자꾸 얘기하면 표정이 달라지지요."

그의 '마음론'은 지극하기만 하다.그는 이를 '샹추(相處)의 정신'이라고 요약한다.'서로 잘 살아보자'는 뜻의 중국어 표현이다. 화음과 조화를 강조하는 그 마음의 소리가 기타의 선율처럼 아름답게 들린다.

다롄=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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