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거 돈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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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해 겨울은 추웠다. 남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시간에 아침도 거른 채 강의실을 찾은 학생들에게 교수님은 사정없이 질문을 던졌다. 대답을 못하면 누구든 망신을 당했다."

하버드대 교수 출신으로 현재 국제통화기금(IMF) 이사인 케네스 로고프의 회고다. 1977년 매사추세츠공대(MIT) 박사과정 시절의 얘기. 학생들 중엔 폴 크루그먼(49·프린스턴대 교수)과 래리 서머스(48·전 미 재무장관·현 하버드대 총장), 제프리 삭스(48·컬럼비아대 교수)도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 오늘날 미국 경제학계에서 '40대 3인방'으로 꼽히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학창시절에도 천재소리를 듣던 이들이 쩔쩔맸던 교수가 바로 지난 주말 타계한 루디거 돈부시다.

<본지 7월 29일자 19면>

MIT 학생이던 크루그먼은 그렇다치고, 하버드대 학생이던 서머스나 삭스가 굳이 남의 학교까지 찾아가 들었던 강의는 돈부시가 MIT 부임 1년 후인 76년에 발표한 '기대(expectations)와 환율변동' 이론이었다. 외환시장에서 시장참가자들의 합리적인 기대가 작용하면서 환율이 성장이나 고용·물가 등 실물지표에 비해 과잉반응한 후 시간을 두고 적정선에 접근해가는 과정을 동태적으로 분석한 이론이다. 과잉반응의 경로 분석에 초점을 맞춰 오버슈팅(overshooting)이론으로도 불리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현실경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돈부시 교수는 미국은 물론 제자들이 많았던 중남미 국가의 경제정책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영철(朴英哲)교수(고려대) 등 지인이 많은 한국도 자주 찾았고,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충고와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사랑했던 일은 역시 교육이었다. 지난해 3월에 기고한 '불평등(Inequality)이 꼭 나쁜 것인가'라는 글에서 그는 노력과 기여도에 따라 성과를 달리하는 불평등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지적했다. 진짜 나쁜 것은 빈곤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과를 억지로 쪼개기보다 교육을 통해 능력을 기르고 발휘할 기회를 고르게 주는 방식을 강조했다. 그래서였을까. 돈부시는 말기 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지난 봄학기에 강의를 강행했고, 지난달에는 스위스 제네바로 날아가 토론회에 참석했다. 가르칠 것이 아직 많이 남은 그에게 주어졌던 60년의 삶은 너무 짧았다. 돈부시 교수의 명복을 빈다.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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