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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리 의장성명에 중·러 동참한 게 성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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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러나 안보리는 공정한 재판관들이 시비를 가리는 사법부가 아니다. 강대국의 권력정치에 지배되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장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이번 의장성명은 후한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필자는 1996~97년 한국이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었을 당시 주유엔 대사였다. 96년 발생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해 안보리가 의장성명을 채택할 때 중국 측과 직접 협상한 일이 있다. 동해안 강릉 근해에서 북한 잠수함이 좌초(坐礁)된 뒤 26명으로 추산되는 북한 특수부대원과 승무원들이 강릉 근처 산속으로 탈출, 이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남북한이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당시 한국은 이 사건을 안보리에 제기했으나, 북한은 자신들의 잠수함이 엔진 고장으로 표류했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유엔총회에 참석 중이던 중국의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에게 북한의 잘못을 입증하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며 설득한 끝에 문맥상 북한에 대한 경고가 담긴 의장성명을 끌어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의장성명 채택 후 2개월쯤 지나서 북한이 이례적으로 사과성명을 발표했다는 점이다. 안보리 의장성명으로 인해 그들의 고립이 더욱 심화된 데다 절박한 식량난 해소를 위해 한·미 양국의 지원 확보와 북·미 관계의 증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북한과 특수관계인 중국은 당시에도 안보리의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북한이 반발할 만한 내용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이번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도 중국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사건의 중대성과 조사단의 과학적·객관적인 결론, 그리고 국제사회의 강력한 북한 규탄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의장성명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북한의 주장은 ‘유의(留意)한다(take note)’란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천안함 침몰은 북한의 책임이라는 우리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대해선 직접 ‘깊은 우려(憂慮)’를 표명함으로써 뚜렷하게 차별화했다.

안보리 의장성명은 안보리의 전 이사국이 한목소리로 채택하는 단합된 의지의 전달 방편이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의 동참을 확보하는 의장성명이 이 두 나라가 불참하는 결의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결국 의장성명을 통해 국제사회는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북한의 책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한국에 대한 추가 도발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단합된 목소리로 북한에 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안보리 의장성명의 정치적·법적 중요성을 존중해 천안함 도발사태에 관해 분명하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사과하고 국제사회 앞에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박수길 유엔한국협회 회장·전 유엔대표부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