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식량난·외교고립 돌파위해 전략 바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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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북한이 갑작스럽게 장관급 회담을 제의한 배경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장달중 교수=북한의 제의는 남북관계에 긍정적 신호로 보입니다. 제의 배경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서해교전 이후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변화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햇볕정책을 지지해야 할 민주당 내부에서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과 미국의 강경정책이 북한 정권에 부담이 됐을 것입니다.

▶허문영 선임연구위원=북한이 처한 경제난과 외교난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됩니다.북한은 균형·편승·돌파·버티기 외교전략을 구사해 왔는데, 이번 회담 제의는 돌파전략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서해교전 이후 위축된 입지 및 식량난을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돌파전략을 세운 것 같습니다.

▶남성욱 교수=북한의 외교정책을 보면 경제적 실리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이미 5월에 양곡창고가 바닥났는데, 대규모 아사(餓死)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선 남한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어 대화를 제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해교전에 대한 북한의 유감표명을 사과로 볼 수 있을까요.

▶장=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북한이 이런 입장을 보인 것은 극히 이례적인 만큼 사과로 봐야합니다.북한으로부터 명백한 사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남=1996년 동해안 잠수정 침투사건 때 두달이 지나서야 입장 표명을 했는데 이번에는 빠르게 유감 표명을 한 것으로 미뤄 북측이 다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북측은 정전 이후 수많은 도발에도 불구하고 유감을 표명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사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북·미,북·일관계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허=서해교전의 여파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방북이 무산됨에 따라 당분간 북·미관계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세계전략 차원에서 북한을 보고 있으나, 북한은 생존전략 차원에서 미국을 바라보고 있어 쉽게 접점을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장=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때와 달리 매우 강경하고 북한에 외교적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핵사찰을 계기로 북·미대화가 재개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북한 경제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을 보더라도 북·미관계가 진전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은 대북 경제봉쇄에 적극적인데다 북한이 완전히 양보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95년과 96년 고난의 행군을 통해 경제난에 내성이 생겼다고 판단한 북한은 웬만큼 어려워도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북한이 서해교전 직후 보호하고 있는 요도호 납치범들을 추방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경색국면을 보인 북·일관계가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북·일관계가 급진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미국의 세계전략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은 일본으로부터 얻을 게 적지 않습니다. 일본은 쌀의 의무수입량이 매년 증가해 50만t에서 5백만t 정도의 쌀을 사료로 써야 할 정도로 재고미가 엄청납니다. 쌀을 외교수단으로 쓰는 게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 진전에 속도를 낼 것입니다.

▶허=북한은 경제난 해결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전후 배상금을 받기 위해 애쓸 것으로 예상합니다.

- 화제를 바꿔 북한이 최근 경제 개혁조치를 취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만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북한체제가 근본적인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인가요.

▶남=최근 북한이 배급제 폐지와 임금인상 등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으나, 이는 사경제와 국가경제 사이의 갭을 현실화시킨 것으로 봐야 합니다. 배급을 할 식량이 바닥나는 등 국가가 책임질 능력을 상실한 데 따른 고육지책인 거죠. 이번 조치에 시장경제적 요소가 있다는 시각도 있으나 본격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했다고 볼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경제의 문제점은 비효율성에 있는데 협동농장 등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해 독립채산제 등을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주의의 본질을 흔들 수준은 아니지요. 따라서 시장경제 도입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국가경제가 침체되면 부패, 뇌물, 외부로부터의 밀무역, 텃밭 생산물 등이 급증하게 되죠. 국가가 식량난을 책임질 능력이 있으면 이런 것들을 단속하지만 지금의 북한경제시스템은 이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장=북한이 이번 조치를 취한 이유는 외부적 요인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은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인데, 고립된 채 10년이나 버텨왔지만 이제 한계가 온 것입니다.

▶허=1993년 김일성이 "사회주의가 망했으니 자본주의와 무역을 해야 한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최근 일련의 정책변화는 경제회복을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북한 경제가 바닥을 친 것은 확실하지만 분명한 회복추세가 나타나기 위해선 해외자본의 투자가 필수적일 겁니다.

- 북한 경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요.

▶장=북한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산량을 늘려야 합니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처럼 인센티브제 등을 본격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북은 자원이 없기 때문에 대외관계 개선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속성상 전면적 개혁을 급속히 추구하기보다 사회주의의 틀 속에서 점진적인 해결을 찾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엘리트 간의 갈등이 불거질 수 있습니다. 갈등이 일어나면 북한의 개혁속도는 빨라질 가능성도 있죠.

▶남=북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제자본이 투입돼야 합니다. 북한의 자본재는 연간 3~5% 밖에 증가하지 못하는데, 자본재가 해외에서 유입되지 않으면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죠.

- 이제 곧 남북간 대화가 재개될텐데요. 정부나 각계에 당부하고 싶은 점을 밝혀 주십시오.

▶장=지금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 이미 합의한 것을 제도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선 남북대화가 지속돼야 합니다. 한반도 문제는 국제문제로 미·일·중·러 등 주변국가와 함께 풀어야 하고, 특히 미 행정부와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지금 시점에서는 대선후보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치열한 대립이 예상되지만,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이용할 경우 한반도 화해·협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리=이철희·정용수 기자

북한이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남북 장관급 회담을 제안함에 따라 경색에 빠졌던 남북 대화에 물꼬가 트이게 됐다. 이는 북한이 추진 중인 경제정책 개선조치와 맞물려 향후 남북관계 전반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장달중(張達重)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남성욱(南成旭)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허문영(許文寧)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과의 좌담을 통해 남북, 북·미관계를 비롯한 한반도 정세와 북한 변화의 배경 및 전망을 짚어보았다. 좌담은 안희창 본사 통일문화연구소 북한팀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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