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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농구 제왕적 '언니문화' 사라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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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지난해 이맘때. 여자프로농구 A팀의 간판이자 최고참 B선수는 기량이 일취월장하던 후배 C선수를 방으로 불렀다. B선수는 "좀 떴다고 건방져졌다"며 C선수가 자신의 기사를 모은 신문 스크랩북을 집어던졌다.

이 사건 이후 C선수는 슬럼프에 빠졌다. 팀에 활력을 넣던 C선수의 부진으로 팀 전체가 어려움에 빠진 것은 물론이다.

여자농구의 위압적 선후배 관계의 한 일면이다. 후배들은 선배들 짐과 식판을 대신 들어주고 빨래도 도맡아 해야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신인급 선수는 "선배보다 튀면 '왕따'당한다"며 "찬스가 나도 슛을 던지기 힘들다"고 했다. 정미라 삼성코치는 "옛날엔 선배들이 숟가락 놓고 나서야 남은 음식을 먹었다"고 회고했다.

여자농구팀의 한 남자 직원은 "남자들 군대 고참·졸병 관계보다 더 심하더라"며 이를 '제왕적 언니 문화'로 표현했다.

이 직원은 "개선을 요구했다가 최고참으로부터 선수 내부문제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면서 "이후 경기를 망칠까 봐 못본 척한다"고 말했다.

변화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2000년 우리은행(당시 한빛은행)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를 고용하자 후배들이 선배를 덜 챙기게 됐다. 중고참들이 이에 대해 불평하자 최고참 조혜진이 "후배들이 연습에 열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솔선수범하자"고 기득권 포기를 주문하는 바람에 개혁으로 이어졌다.

남자농구에서 온 감독들도 변화를 만들었다.

지난해 현대를 지도했던 정덕화(SBS 스타즈)감독은 "프로에 이런 전근대적인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느냐"며 "실력으로 평가받는 프로의식을 키워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스타들의 퇴조도 관계가 있다. 세대교체가 진행 중인 삼성생명의 젊은 선수들은 "이제 새로운 문화를 만들겠다"고 자정 결의를 했다.

반면 아직도 위계가 확실하기로 소문난 D팀의 감독은 "여자농구의 활성화를 가로막는다는 것도 모르고 '옛날엔 이랬다'며 후배들의 기를 죽이는 고참들이 아직도 있다"고 개탄했다.

분위기가 바뀐 팀 선수들은 표정이 밝고 전력도 좋아졌다. 대표적 개혁 구단 삼성생명과 현대가 엎치락뒤치락 선두경쟁을 벌이는 것이 그 증거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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