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치9단의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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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대통령(DJ)의 외로움은 커지고 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까지 햇볕정책의 간판을 내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인제 의원은 DJ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규정하면서 사례로 햇볕정책을 들었다. 햇볕정책은 DJ 리더십의 마지막 남은 자부심이다. 여론비판을 받아도 성역(聖域)처럼 고수해왔다. 그러나 이제 내부에서도 햇볕에 반기를 들고 있다.

지난번 노풍(風)이 불 때 의원 쪽에선 그 배후로 DJ를 지목했다. 중대한 밀약이 있다는 의심도 했다. 퇴임 후에도 DJ가 대북정책에 관한 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이상으로 활동할 수 있게끔 후보가 보장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혹만큼이나 햇볕정책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후보의 변심은 DJ로선 충격이다.

이런 상황은 金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그 핵심 요인은 6·29 서해교전 사태의 관리 실패다. 작은 전투에서 지고 이기고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글귀를 들지 않더라도 흔한 일이다. 문제는 DJ정권 담당자들의 무기력과 모호함이다. 북한의 도발을 단호하게 꾸짖지 못한 채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엉뚱하게 우리 어선의 북상 책임론이 퍼졌고, 친북좌파의 낡은 이념이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우리 내부의 이념 갈등도 도졌다.

DJ에게 치명적인 것은 역사의 호기를 놓치고 있는 점이다. 월드컵에서 분출한 국민 대통합의 열정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이승만~김영삼 정권 어느 때도 이런 장엄한 국민 단합은 없었다. 테러없는 안전, 정보기술(IT)의 정권적 역량도 뒷받침됐다.'DJ시대 월드컵=대통합'은 노벨상보다 값진 치세(治世)의 브랜드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쾌거를 햇볕정책이 손상될까 조바심하는 탓에 국정 마무리의 동력으로 써먹지 못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DJ 두 아들의 부패문제가 두드러지면서 국정 장악력을 잃었다. 후보도 탈(脫)DJ의 극적인 카드 마련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마늘 협상을 잘 몰랐다는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의 주장은 권력 내부의 이탈 분위기에서 나온 코미디다.

DJ는 실리의 정치인이다. 철학적 정객의 면모도 다듬었지만 실리추구의 정치9단이다. 그런 점에서 월드컵 화합의 호재를 놓친 국정 무능은 미스터리다. 실리의 감각이 무뎌져서일까, 햇볕정책을 독창적인 작품인양 내세운 탓에 유연성을 잃어서인가. 아니면 야당 일각에서 의심하듯 북한에 책잡힌 게 있어서 햇볕에 하염없이 집착한 것인가. 그 미스터리의 해소는 金대통령의 남은 과제다.

햇볕의 기조인 화해협력은 국민 대부분이 지지한다. 그러나 확고한 안보 위에서 그것을 추진하겠다는 DJ의 다짐은 설득력을 잃었다. 월드컵 단합에는 대한민국의 당당함과 국민적 자신감이 있다. 대북 문제도 경제난으로 굶주리는 북한 주민을 도와주되 지도부의 대남 탈선은 당당하게 문제삼으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해도발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시했다 해도 문제고, 안했다면 통제 면에서 문제'라는 DJ의 군사평론가적 발언은 월드컵 민심과 맞지 않다.

햇볕정책은 다듬을 수밖에 없다. 그 출발은 햇볕의 전도사인 청와대 임동원 특보의 후퇴 문제부터 따져봐야 한다. 지난 4월 특보가 金위원장과 만난 뒤 가져온 교류화해의 프로그램은 실천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런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군사적 긴장을 유발한 데 대한 시위성 메시지가 절실하다. 그것은 특보의 일선 업무 후퇴다. 이는 우리 내부적으로 햇볕의 재정비 의지로 평가받을 수 있다.

DJ한테 그런 용기가 없다면 햇볕 정책을 더 이상 펼치지 말고 현상유지 상태로 두어야 한다. 햇볕정책과 국민대통합 정치의 우선 순위도 바꿔야 한다. 대통합 밑에 있어야만 햇볕도 여론에 의해 폐기처분되지 않고 다음 정권에서 다시 쓰라고 넘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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