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후보의 오락가락 햇볕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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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가 엊그제 햇볕정책과 관련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일본 언론인들과의 간담회에서 "대북정책이 한계에 봉착했다. 햇볕정책이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추진 과정에서 국민의 동의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정략적으로 이용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등 그의 비판 이유엔 공감이 간다. 하지만 정책·소신의 일관성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는 여태껏 "햇볕정책은 수정해선 안된다" "다른 대안이 없다"며 "당선되면 확실히 승계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예 "남북대화만 잘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다 깽판쳐도 괜찮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

이러다가 갑자기 햇볕정책 비판론을 들고나오니 서해교전 이후의 인기 영합 아니냐는 힐난이 나온다. 지지율이 땅에 떨어진 DJ와 선을 그으려는 정치적 술수로 폄하되는 것이다. 후보를 더 우습게 만든 것은 같은 당의 한화갑 대표가 자신의 발언을 신랄하게 꼬집자 또 한번 말을 바꾼 점이다. 대통령후보에게 "공부부터하고 말하라"는, 민망스러운 비난을 퍼부은 韓대표의 태도는 논외로 치더라도 거기에 놀라 하루 만에 "가지를 친다고 나무가 죽느냐" 운운하며 뒷걸음질 친 그의 처신은 아무래도 떳떳지 못하다. 그 정도로 자신이 없다면 뭣하러 외국 언론인들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늘어놨는지 이해가 안간다.

'깽판'과 같은 막말 습관과 함께 후보의 잦은 '말바꾸기'는 도덕성·성실성과 관련해 늘 시비가 돼 왔다. 대통령후보의 말이 자기 편한 대로 바뀐대서야 어찌 믿음이 가겠는가.

대북 포용정책이란 한 정권이나 한 정치지도자의 말 바꾸기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일회성 정책이 아니다. 이미 노태우 정부 당시 남북 기본합의서가 남북간에 체결되면서 포용정책은 우리 대북정책의 기본이 돼왔다. 이 기본정책을 정권 편의를 위해 어떻게 변용하고 왜곡했느냐에 비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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