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f&] ‘젊은 그대’ 정연진·안병훈, 600년 골프 성지에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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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올해로 150년을 맞는 유서 깊은 이 대회에 한국의 아마추어 청년 2명이 도전장을 던졌답니다. 올해 스무 살의 정연진과 열아홉 살 안병훈입니다. 브리티시 오픈에 출전하는 두 청년의 이야기를 세인트앤드루스 현장에서 들어봤습니다.

브리티시 아마추어 골프대회 우승자 정연진(왼쪽)과 지난해 열렸던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우승자 안병훈이 제139회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고 있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 클럽하우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세인트앤드루스=정제원 기자]

정연진 “우즈와 같은 대회 출전 꿈만 같아요”

“꿈이 이뤄졌다고 할까요. 그렇지만 여기서 끝은 절대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정연진(20)은 억센 부산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스코틀랜드 뮤어필드 골프장에서 열린 브리티시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그다. 브리티시 아마추어 골프대회는 영국왕실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아마추어 골프대회. 1885년 시작된 이 대회에서 아시아 선수가 우승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내로라하는 세계 각국의 아마추어 골퍼 288명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정연진은 홈코스의 제임스 바이른을 5홀 차로 제치고 챔피언이 됐다. 스코틀랜드 현지에선 기대했던 바이른이 앞서 나가다 역전패를 당하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당장 스코틀랜드 현지에선 ‘정’이란 이름의 아시아 선수가 도대체 누구냐는 반응이 나왔다.

“지금도 얼떨떨합니다. 다른 샷도 괜찮았지만 특히 퍼팅이 잘된 덕분에 우승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타이거 우즈와 필 미켈슨 등 세계 정상급 프로들이 모두 출전하는 브리티시 오픈에도 출전할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브리티시 오픈만큼은 꼭 출전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연진이 골프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1년. 열렬한 골프팬인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에 입문한 그는 “2002년 어니 엘스(남아공)가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하는 것을 TV로 지켜보면서 ‘골프선수가 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 코스에선 공을 어느 방향으로 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요. 이제까지 연습 라운드를 서너 차례 해 봤는데 처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더라고요.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물론 좋겠지만 욕심내지 않고 ‘한 수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경기를 풀어나갈까 합니다.”

키 1m76㎝, 몸무게 71㎏의 호리호리한 체격인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타이거 우즈(미국). 그의 카리스마와 실력을 닮고 싶단다.

“세상 사람들은 여자 골프는 세계 무대에서 통하지만 남자 골프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세계 랭킹 1위가 되는 그날까지 한번 해볼 겁니다.”

기자가 “세계랭킹 1위가 정말 가능하겠느냐”고 재차 물었더니 그는 발끈했다.

“3년 전만 해도 제 세계랭킹은 1000위 밖에 머물렀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아무도 몰라주는 무명 골퍼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올해 세계랭킹 1위에 올랐습니다. 프로 무대에서도 해볼 겁니다. 쉽지만은 않겠지만 기왕 시작한 것 끝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브리티시 오픈에 출전하는 걸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엔 이르다는 거지요.”

안병훈 “미켈슨과 연습 라운드 재밌었죠”

“아주 재미있었어요. 미켈슨이 ‘잘하라’고 격려해 주던걸요.”

열아홉 살 안병훈은 느긋하다. 키 1m86㎝, 몸무게 96㎏의 이 청년은 서두르는 기미가 없다. 브리티시 오픈 개막전인 14일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필 미켈슨(미국), 닉 팔도(잉글랜드), 더스틴 존슨(미국) 등 쟁쟁한 선배들과 연습 라운드를 마치고서도 별일 없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는 물론 처음이지요. 직접 와 보니깐 ‘아, 이래서 올드코스를 골프의 고향이라고 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어웨이는 무척 넓은 편인데 그린이 무척 어렵더라고요. 그린을 놓치면 두세 타쯤 타수를 까먹기가 쉽겠어요.”

안병훈은 “특히 OB가 없어서 좋더라”며 껄껄 웃었다.

안병훈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커플인 탁구 스타 안재형(45)-자오즈민(47) 커플 사이의 외아들. 안병훈은 지난해 US아마추어챔피언십 챔피언 자격으로 브리티시 오픈에 출전하게 됐다.

“오늘 연습 라운드를 해 봤는데 1번과 18번홀은 비교적 쉬웠어요. 그런데 17번홀은 듣던 대로 까다롭더군요. 바람이 불면 더 어려워질 것 같아요.”

안병훈은 느긋한 성격답게 미켈슨·팔도 등 정상급 골퍼들과 연습 라운드를 하면서도 주눅이 들기는커녕 거리로 선배들을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오늘 저랑 미켈슨이랑 한편이 되고, 팔도랑 존슨이랑 다른 편이 돼서 50파운드 내기를 했거든요. 17번홀까지 저희가 3업(up)으로 이겼는데 저쪽 팀에서 마지막 18번홀에서 다시 홀매치를 하자는 거예요. 저랑 미켈슨 모두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해서 또 이겼지요. 아 참, 돈 받으러 가야 하는데….”

브리티시 오픈에 처음으로 출전하는 안병훈은 “드라이버가 오른쪽으로만 밀리지 않으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면서도 “코스가 꽤 긴 편인 데다 그린이 워낙 딱딱해 미국 코스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는 모두 8명. 한국계 선수를 포함하면 9명이나 된다. 대회 조직위는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국가 중 출전 선수가 많은 8개국을 선정한 뒤 해당 국가에 내보내는 중계방송에는 그 나라 선수들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이를테면 국내에 방송되는 중계 화면에는 세계적인 골프스타들의 플레이와 함께 한국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많이 담게 된다.

안병훈은 “대한민국의 골프 실력이 좋아지면서 위상도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 아니겠느냐”며 “브리티시 오픈에 서게 된 것만으로 영광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겠다”고 덧붙였다.

세인트앤드루스=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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