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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잃은 여윳돈… 일단 '집으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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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아파트로의 돈 쏠림 현상이 심하다. 저금리 체제가 오래됐지만 최근 시중 여윳돈이 부동산, 그 가운데서도 유독 아파트로만 몰리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아파트값이 슬금슬금 오르고 있으며 새 아파트 분양시장 열기도 뜨겁다.

유니에셋 오석권 전무는 "가격이 오른 아파트는 재건축 대상이 대부분"이라며 "실수요자가 많아 값이 올랐다기보다는 저가매물이 사라지면서 호가가 뛰어 평균값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르긴 해도 기반은 취약="이상합니다. 오를 재료가 없는데 값은 뛰니깐 말이죠." 서울 대치동 L공인중개사무소 사장은 요즘처럼 감(感)잡기 어려운 적이 없다고 말한다. 지난해 말 엄청나게 올라 이제 저항선이 형성됐다 싶었는데 또다시 들썩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집값 강세의 한 가운데에 재건축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 저층아파트 단지는 서울시가 평균 용적률을 2백% 이하로 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값은 되레 뛰고 있다.

2단지 16평형은 일주일 사이 2천5백만원 올라 3억6천5백만~3억7천5백만원이며 3단지 15평형도 4억1천만~4억2천만원으로 2천만원 뛰었다.

지난 20일 시공사를 정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31평형이 2천만원 오른 4억4천만~4억8천만원이다. 강남의 상승세는 잠실 저밀도지구로 번지고 있다. 잠실주공1단지 13평형은 일주일 만에 2천여만원 상승해 2억8천5백만~2억9천5백만원이고 현재 이주 중인 4단지 17평형 역시 1천만원 뛰어 4억2천5백만~4억3천만원이다.

재건축 대상 인근 고층아파트도 오름세다. 개포 고층아파트는 일주일 새 1천만~2천만원 올랐고, 잠실주공5단지 34평형은 서울시가 지난 7일 고밀도개발계획을 내놓은 이후 6천여만원 오른 4억8천만원선이지만 매물이 없다.

서울 개포동 미래21공인중개사무소 김봉균 사장은 "재건축 대상 아파트가 개발 기대감으로 오르지만 세무조사 등의 여파로 매물이 없다보니 값이 뛰는 것이며 실제 거래는 잘 안된다"고 말했다.

방학을 맞아 학군 수요도 일부 움직이고 있다. 대치동 미도아파트 41평형은 6억7천만~7억5천만원으로 3천5백만원 상승했고, 분당 서현동 시범삼성아파트 70평형은 1천만원 올라 5억3천만~6억2천만원에 거래된다.

돈 쏠림 현상은 분양시장이 더 심하다. 지난 12일 경기도 화성 태안 우남퍼스트빌 모델하우스는 하루종일 방문객으로 북적거렸다. 3백52가구가 18일 1순위에서만 4.3대 1의 경쟁률로 마감되자 회사 관계자는 "3순위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예상밖의 결과"라며 "투자 목적이 절반을 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경기도 광주·수원·김포,충남 천안 등지에서 분양된 아파트들도 쉽게 팔렸다.

◇요인은 복합적=정부의 강력한 개입의지로 한 차례 꿈틀하던 금리가 최근 들어 완전히 주저앉으면서 부동산시장을 들썩거리게 하고 있다. LG투자증권 윤항진 채권담당 과장은 "주식시장 침체와 초저금리체제가 오래가면서 마땅하게 돈 굴릴 곳이 없자 투자자들이 부동산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있다"며 "특히 경기는 좋아졌는데 금리는 오히려 내려 금융시장과 경기지표가 따로 노는 이상 현상이 아파트시장을 달구는 큰 요인"이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3년만기 국고채 유통수익률의 경우 지난 5월 초 한국은행이 콜금리를 올릴 때만 해도 연 6.34%까지 올라갔으나 23일에는 연 5.64%로 떨어졌다. 환율이 떨어지는 것도 금리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부동산·채권 전문가들은 한은이 콜금리를 연말에 가서야 0.25%P 정도 올리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하고 "이럴 경우 여윳돈이 아파트로 몰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고 있다.

하나경제연구소 곽영훈 거시경제팀장은 "지금처럼 견고한 저금리 체제가 이어지고 정부의 강력한 억제책이 없다면 부동산 시장의 활황이 계속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심리적 요인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저금리 상황에서 아파트 투자는 "손해볼 일이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퍼지면서 가수요가 많이 몰리고 있다. 특히 부동산업계에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표를 의식해 부동산 시장에 손을 대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분양시장이 활황인 데는 업체들이 내건 달콤한 조건도 많이 작용한다. 분양되는 아파트들이 대부분 '계약금 10%에 중도금 전액 무이자' 조건이다. 세중코리아 김학권 사장은 "웬만한 아파트는 자금부담이 없기 때문에 가수요·실수요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고 전했다.

게다가 지난해 말과 올 초만 해도 오피스텔·상가 등으로 분산되던 여윳돈이 공급과잉으로 오피스텔의 수익성이 불투명해지자 이제는 아파트로만 집중되고 있다. 투자의 편중화가 심화되는 것이다.

◇반짝 장세인가=전문가들도 거래가 별로 없는 가운데 호가만 높아 반짝장세일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책임연구원은 "저금리로 돈이 많이 굴러다니는데다 정부가 수도권을 집중 개발하는 청사진을 내놓는 바람에 가수요가 많이 늘어났지만 실수요가 받쳐주지 않는 한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도 "지금 아파트 시장이 불안한 것은 계절적 수요가 예년보다 빨리 움직인데 따른 것"이라며 "올라도 폭이 크지 않을 것이며 특히 하반기에는 입주물량이 많아 집값 조정기가 내년 하반기에서 올연말로 당겨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거래가 크게 줄어든 점을 감안하면 주택시장이 초기불황에 접어든 것"으로 풀이했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재룡 수석연구원도 "계절적 수요로 반짝할 지 모르지만 집값 상승대세는 3월 이후 이미 꺾였다"며 "미국경제가 이중침체에 빠질 경우 국내 부동산도 상승세를 타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부동산업계 일부 전문가들은 생각을 달리한다. RE멤버스 고종완 사장은 "주택보급률은 지표에 불과하며 자가주택 비율이 50%에도 못미치기 때문에 집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며 "국세청 세무조사도 처음엔 강도 높게 시행되는 듯 했으나 그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 집값을 안정시키는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텐커뮤니티 정요한 사장은 "요즘의 집값 상승은 공급 부족이라는 구조적인 원인이 더 크다"며 "특히 서울은 규제 일변도인 데다 땅은 부족해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다.

박원갑·서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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