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땅 티베트 김 미 진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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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아무래도 나는 방랑자 기질이 있어 항상 어디론가 떠날 궁리만 한다. 그 동안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데, 막막한 허무로 나를 껴안던 티베트의 모래바람을 잊을 수가 없다.

티베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순례자의 땅이다. 콩가 공항에 도착하니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포탈라 궁이 있는 라사까지 가는 동안 속이 매스껍고 어지러웠다. 땅에 내려서니 발짝을 잡아당기는 중력으로 온몸이 바윗덩이였다.

고산증세로 인한 어지럼증은 금세 적응되었으나 울렁증은 가시지 않았다. 라마승들이 경배를 드리는 사원에 들어설 때면 메슥메슥한 냄새가 더욱 역했다. 안내원은 수백 개의 향로마다 야크버터가 타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버펄로처럼 생긴 야크는 노동력은 물론 배설물까지도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고산짐승이다.

티베트에서는 현지 안내원 없이 여행할 수 없다. 중국정부에서 이곳의 독립운동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용 볼거리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안내원을 따돌린 후, 네팔 공주가 시집 온 후에 건축된 소소사에 당도했다.

사원의 황금빛 지붕 위에서는 긴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고, 색색가지 천들은 풀리지 않는 윤회의 환영처럼 펄럭였다. 이리저리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주름이 자글자글한 고승이 유리창 안에서 손짓을 하며 불렀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왕초 라마승의 거처를 구경하게 되었군. 나는 얼씨구나 쫓아갔다. 고승은 자신의 사진을 찍어 달라며, 붉은 장삼을 폼 나게 두르고,안경까지 척 꺼내 썼다. 평생 석가모니불을 모시던 구도자의 모습은 어디가고, 기껏 벽에 걸린 달라이 라마 사진 흉내를 내다니. 어리벙벙하면서도 재미있었다.

고승을 수발하는 라마승이 보온병에 있는 차를 따랐다. 뜨거운 막걸리처럼 보이는 액체가 수상쩍었다. 고승이 자꾸 권하는 바람에 한 모금 마시던 나는 그대로 푸,토하고야 말았다. 나를 괴롭히던 느글느글한 냄새. 그것은 바로 야크버터로 만든 야크티였다.

다음 날에도 안내원을 따돌리고 택시를 타고가다 허름한 마을 어구에서 내렸다. 볼때기가 빨갛게 탄 아이들이 따라붙더니 어른들까지 줄줄이 쫓아왔다. 자기들이랑 비슷하게 생긴 외국인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발음하는 그들이 신기했다. 계집아이는 낯설음도 없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들의 환대로 구석구석 둘러보고 쟁기를 멘 야크도 구경했다. 이곳에 닻을 내린 순수의 빛과 척박한 가난을 등지고 떠나올 때 아이들은 오래오래 손을 흔들며 서있었다.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뿌연 장막처럼 모래안개가 솟구쳤다. 달라이 라마와 오체투지로 표상되는 신기루의 고원에서 죽은 자들의 혼백처럼 나부끼던 오색 깃발. 온전히 존재하는 것조차 뭉개지듯 부유하던 그해 봄, 순례자의 땅에 휘몰아치던 모래바람은 이 세상의 끝이고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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