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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그 옛날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이 쓴 우리 옛 이야기.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망명했던 이미륵이 어릴 적 읽은 설화·민담 모음집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독일에서 냈던 책이다. 독일판 서문에는 "율곡 선생은 한국의 옛이야기와 동화·전설·일화 등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긴 분이다. 우리집 책장에서 2백여 페이지나 되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이 바로 율곡 선생께서 수집한 이야기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황홀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아버지께서는 내 글씨를 고칠 겸 해서 책 내용을 하나하나 베끼라고 하셨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수집했다는 그 이야기책은 안타깝게도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책이름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미륵의 이야기』는 작가의 기억에 의존해 상당 부분 각색된 새로운 내용의 옛 이야기로 봐도 무리가 없다. 설화·민담의 정확한 전승 유래에 무게를 두자면 허약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해주에서 지낸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독일로 망명 유학을 떠나기까지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압록강은 흐른다』로 독일 독자들에게 적잖은 감동을 준 이미륵이 쓴 옛 이야기는 새로운 맛을 지니고 있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인정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차 있어서인지 그가 다룬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가난하면서도 남을 도우려는 선비, 불구의 시부모와 앞 못보는 남편을 봉양하는 부인 등 심성 고운 이들이 대부분이다. 저승사자를 피해다니며 삼천년을 살았다는 동방삭,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책에서는 김봉희로 나옴) 등의 이야기에서는 한국적 해학도 풍긴다. 이런 따스함과 유머가 이 책에 생명력을 주는 요소다.

1950년 뮌헨 교외에서 이미륵이 세상을 떠난 뒤, 74년 독일에서 『이야기(Iyagi)』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아직도 독일에서 애독되고 있다고 한다. '열녀'나 '효자'라는 독일인들에게는 생소한 말은 한마디도 안 나오면서도 이웃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는 한국인들의 성정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잣집 외아들을 대신해 저승에 갔다 되돌아온 하녀 복심이가 그 외아들과 결혼해 만복을 누리며 살고, 도둑은 도둑질을 하려던 집안의 가난한 사정을 알고 오히려 쌀과 고기를 가져다 주며, 주인집에서 쌀 한가마니를 훔쳐 나오던 마부를 보고 영감마님은 마님이 보기 전에 얼른 가지고 나가라고 한다. 이런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에 이미륵 특유의 정감 묻어나는 표현들이 어우러져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올해 초 나왔던 『이미륵의 이야기 1』에도 '토끼야 용궁 가자' 등이 실려 있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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