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국적 제약社 약가정책 對정부 로비 美,서한·방문 통해 영향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의 약가정책과 관련, 미국 정부가 직접 방문·편지 보내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약분업 후 의사들의 처방이 다국적 제약사들의 약으로 급속히 바뀌면서 호황을 구가해왔다. 그러다 건강보험 재정대책의 하나로 참조가격제 등으로 제동을 거는 과정에서 마찰이 빚어진 것이다.

◇반대 서한=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난달 20일 다국적 제약사 세곳이 참석한 참조가격제 실무협의회에서 우리가 시행방침을 밝히자 다국적 제약산업협회가 회의 직후 반대의견을 담은 서한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이 서한은 "유럽의 경험에 비춰볼 때 참조가격제가 건강보험 재정절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환자가 싼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환자에게 손해를 끼치며 선택권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했다.

◇수입약가 제도 허점=종전에는 수입약은 건강보험에 등재되지 않았다. 대신 의료기관이나 약국 등의 영수증을 내면 그 가격대로 값을 쳐줬다. 반면 국산 약들은 약값 마진이 많아 의사들이 선호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시장차별이라고 항의하자 1999년 7월 수입약을 약제목록에 등재하면서 평균 23% 값을 내렸다.

2000년 7월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다국적 제약사들은 승승장구했다. 의사들의 처방이 다국적 제약사들의 오리지널 약(처음 개발한 약)이나 고가약(같은 성분 중 가장 비싼 약)으로 급속히 바뀌면서 매출이 급증한 것이다. 지난해 약제비 4조5천억원 중 1조원 가량을 다국적 제약사들이 차지했다.

◇참조가격제 시행연기 배경=참조가격제는 같은 성분의 약값을 평균해 이의 두배를 넘는 약값은 환자가 부담하는 제도다. 비싼 약의 일정 부분은 환자가 부담해야 하니 의사가 처방하지 않게 된다. 고가약이 많은 다국적 제약사의 이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제도는 지난 1년사이에 '전면시행-보류-시범사업'으로 오락가락했다. 지난해 8월 전면 시행키로 했으나 그해 9월 보류됐고 10월께는 사실상 백지화됐다. 김원길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당시 "통상문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태복 전 장관이 지난 4월 시범사업으로 시행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그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김성호 신임 복지부장관은 18일 국회 답변에서 "참조가격제를 시행하면 연간 1천6백여억원의 건보재정이 절감되지만 이 돈이 고스란히 만성질환자 등 환자에게 전가돼 국민 동의를 받은 뒤 추진하겠다"며 시행 불발 이유를 환자 반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관행인가, 압력인가=외교통상부 박효성 북미통상과장은 "지난 3월 미국이 우리 철강제품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취했을 때 우리도 항의서한·방문 등의 방법으로 대응했다"면서 "약가정책과 관련한 미국의 일련의 조치는 상궤를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세대 이규식 보건과학대학장은 "참조가격제는 독일·네덜란드 등에서 이미 시행하는 제도인데도 미국이 반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신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