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23회 성장신화大宇의몰락2> 삼성車와 빅딜 실패… 김우중 마지막 희망 물거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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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99년 6월 30일. 대우가 붙잡고 있던 마지막 동아줄이 끊어졌다.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합니다. 법정관리 후 삼성그룹은 삼성차 경영에서 손을 떼고, 삼성차의 운명은 채권단에서 결정할 것입니다."

이대원 당시 삼성자동차 부회장은 이날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을 전격 발표했다.6개월 전인 98년 12월 공식발표 후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오던 삼성차-대우전자 간의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빅딜을 성사시켜 자금난을 풀어보려던 김우중 회장의 마지막 승부수도 덩달아 수포로 돌아갔다.

5대 그룹 구조조정 실무 책임을 맡고 있던 서근우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제3심의관의 회고.

"삼성차의 빚을 떠안고 대신 삼성에서 2조원 이상의 부실처리 비용을 받아내려던 김우중의 구상이 무산되면서 대우는 급속히 침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더 이상 돈 들어올 곳이 없어지자 모든 금융기관들이 너나 없이 대우 빚 독촉에 나섰다."

시간은 이미 대우의 편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조원씩의 빚이 돌아왔고, 대우의 몰락은 초읽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보름여 뒤인 7월 19일, 김우중은 주식 등 10조원어치의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4조원의 자금을 지원받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결국 한달여 뒤인 8월 26일 대우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의 운명을 맞는다.

이처럼 당시 대우 몰락의 직격탄이 된 삼성차-대우전자 빅딜 실패는 정·재계의 복잡한 수읽기가 난마처럼 얽혀 빚어낸 한편의 드라마였다. 처음 각본을 쓴 사람은 김우중이었지만, 삼성이나 정부쪽 주연 배우들은 그의 각본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대우는 물론 삼성과 정부에도 삼성차 처리는 피말리는 생존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짚어보려면 시계바늘을 되돌려 삼성차 빅딜의 궤적을 쫓아가봐야 한다.

김우중이 삼성차 빅딜을 구체화한 것은 98년 11월 초.

보름여 전인 10월 19일, 세차례의 공개입찰 끝에 기아자동차가 현대쪽으로 넘어간 직후였다. 기아차를 인수해 덩치를 키운 뒤 구조조정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던 김우중은 전략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우중은 기아차 대신 삼성차로 목표를 바꿨다. 김태구 당시 대우자동차 사장은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나 삼성차 인수를 제안했다.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의 회고.

"삼성-대우그룹 간 빅딜은 당초 김우중 회장의 발상이었다. 공식 제안은 김태구 당시 대우자동차 사장이 했다.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맞교환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재정경제부와 금감위 등에서도 이를 구체화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삼성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삼성차는 4조원이 넘는 빚을 안고 있었고, 삼성 그룹은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11월 중순 삼성그룹의 영빈관인 한남동 승지원에서 김우중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헌재 금감위원장과 3자회동을 갖고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에 합의한다. 삼성차의 빚을 대우가 안아 가고 삼성은 대우전자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삼성차 처리 비용을 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합의는 길고 긴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당장 10여일 뒤인 12월 7일 DJ와 5대 그룹 총수가 청와대에서 만찬을 겸해 가진 제1차 정·재계 간담회부터 진통이었다.

정부는 삼성과 대우에 이날 삼성차 빅딜을 공식 발표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방법·절차를 놓고 양측은 팽팽히 맞서 간담회 하루 전날까지도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금감위가 중재에 나서도록 했는데도 합의가 안돼 간담회 연기를 검토하기까지 했다. 간담회 당일 오후 1시가 넘어서야 가까스로 합의가 이뤄졌다. 합의문을 다시 칠 시간도 없어서 막판엔 펜으로 몇 글자만 수정한 뒤 양측의 서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삼성차 빅딜을 공식 발표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삼성차 직원들이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부품·협력업체들이 반발하면서 삼성차 부산공장의 조업이 중단됐다.

'부산 경제를 위축시키려는 호남 정권의 음모설'까지 돌았다. 부산 민심은 크게 나빠졌다. 급기야 삼성차 빅딜은 경제 문제에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도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강봉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회고.

"빅딜 발표 후 부산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DJ도 부쩍 삼성차 문제를 챙겼다. 일단 부산 공장을 정상 가동시키는 것이 급했다.(대우가) 나중에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대우가 일단 삼성차를 인수해 공장을 돌렸으면 하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합의 시한을 한달 이상 넘기고도 두 그룹은 삼성차와 대우전자 가치평가에 합의하지 못했고, 빅딜 협상은 한 걸음도 진전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부산 민심은 갈수록 나빠졌다.

마침내 99년 1월 31일 청와대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강봉균은 이날 저녁 청와대 서(西)별관으로 대우 김태구와 삼성 이학수를 불렀다. 강봉균은 일단 인수부터 하고 나서 훗날 정산하도록 하는 '선(先)인수 후(後)정산' 방식을 제안했다.

삼성은 받아들였지만 대우가 버텼다. 이학수는 먼저 합의서에 서명한 뒤 돌아갔지만, 김태구는 강봉균과 마주 앉은 채 자정을 넘기도록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대우는 사흘 뒤인 2월 3일 합의문 자구를 몇자 손질하고 '선인수 후정산'을 받아들인다. 두 그룹은 2월 15일까지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기로 했다. 진전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난마처럼 얽힌 삼성차 해법은 여전히 미로찾기였다. 다시 서근우의 회고.

"하나의 매듭을 풀면 다른 매듭이 나타나는 식이었다. 이번엔 삼성차 SM5의 생산기간과 판매 등이 쟁점이 됐다. 대우는 SM5를 2년간 매년 5만대씩 생산하되 판매는 삼성이 책임지라는 반면 삼성은 5년간 매년 7만대 이상 생산이 이뤄져야 하며 판매도 대우가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협상은 또 공전했다."

3월 22일, 이헌재는 두 그룹 총수가 직접 만나 빅딜을 마무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우중과 이건희는 이헌재와 이규성 당시 재경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힐튼호텔에서 극비 회동을 갖고 이날 밤 11시30분까지 쟁점을 조율했다. 두 총수는 인수가격을 제외한 SM5 생산조건 등 삼성차 인수 합의안에 서명, 다음날 공식 발표한다.

이날 합의에 따라 대우는 삼성차를 4월 말까지 완전 인수키로 하고 대우자동차 김석환 부사장을 대표로 한 삼성차 인수팀을 부산공장에 파견했다. 공식 발표 후 1백일, 삼성차 빅딜이 마침내 종착역에 다다른 듯했다. 그러나 인수가격 산정 등 구체적 사항에 이르자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삼성차 처리비용을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김우중의 계산과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삼성측의 갈등 탓이었다. 금감위의 강력한 중재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5월 초 금감위가 DJ에게 보고한 '삼성차 처리현황'이란 대외비 보고서에는 당시의 이런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련번호를 매겨 DJ와 김중권 비서실장, 강봉균 경제수석, 이헌재 금감위원장, 청와대 의전수석 등 다섯 곳에만 전달된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옮긴다.

·삼성자동차의 핵심 쟁점은

①대우에 이관하는 삼성차의 자산을 얼마로 평가할 것인지

②삼성측에서 대우에 자금을 얼마나 제공할 것인지

③삼성차에 남게 되는 나머지 부채를 삼성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의 세가지임.

·금감위는 양측의 입장을 토대로 중재안을 만들어 조속한 타결을 종용하고 있음. 금감위안은

①삼성차 자산은 2조원으로 평가해

②삼성은 대우에 총 2조원의 자금을 제공(전환사채 인수 또는 출자 방식)

③삼성차에 남게 되는 부채(2.7조원)는 이건희 회장의 사재출연, 계열사 출자 및 부채구조조정(만기·금리 조정) 추진

·이같은 중재안에 대해 삼성은 아직까지 외국인·소액주주의 반발로 계열사 손실분담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으며

·대우도 삼성측으로부터 보다 유리한 조건의 자금지원을 요구 중

·중재노력을 적극화하여 가까운 시일 내 타결되도록 하겠음.

다시 지루한 협상이 계속되자 삼성은 다른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대우에 코가 뀄다간 두고두고 속을 썩을 것인 만큼 대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그룹 재무팀에서 나왔다.

6월 11일 이학수가 은행회관 집무실로 강봉균을 찾았다. 5·24 개각으로 강봉균은 재정경제부 장관이 되어 있었다. 이학수는 이 자리에서 법정관리 방침을 처음 밝힌다.

"삼성차는 법정관리로 처리하겠습니다."

강봉균은 깜짝 놀라 노발대발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4조원이 넘는 빚을 어쩔 셈이오. 대안이 있습니까."

"복안이 있습니다."

"무조건 삼성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합니다.(삼성차는)명예롭게 퇴진하세요."

이학수는 그 자리에서 나와 곧바로 여의도 금감위원장실로 이헌재를 찾아가 마찬가지로 법정관리행(行)을 통보했다. 그리고 20일 뒤인 6월 30일 삼성은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을 공식 발표한다. 삼성차 빚은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주당 70만원으로 쳐서 갚겠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김우중은 DJ에게 구체적으로 금액까지 적어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답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6월 어느 날 김우중 회장이 DJ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지원 요청 금액은 3조~4조원 가량이었는데 金회장이 숫자를 적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DJ는 金회장이 (구조조정 등) 약속을 안 지킨다며 역정을 냈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만일 당시 김우중의 계산대로 삼성차-대우전자 빅딜이 이뤄졌다면 대우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헌재의 대답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다'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는 시장이 완전히 등을 돌려 (빅딜이 됐더라도)대우는 워크아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삼성자동차 빅딜 추진 일지

▶1998년 10월 19일:현대, 기아자동차 낙찰자로 선정

▶12월 2일:강봉균 경제수석 '삼성차 빅딜 추진'발언

▶12월 7일:청와대 정·재계 간담회, 삼성차-대우전자 빅딜 공식 발표

▶12월 9일:삼성차 직원 2천여명 고용보장 요구 상경시위. 삼성차 부산공장 무기한 조업중단

▶12월 16일:대우, '삼성-대우 합의문'발표

▶12월 22일:기업구조조정위원회, 빅딜 평가기관으로 DTT사 선정

▶1999년1월 13일:삼성-대우, DTT사와 빅딜 실사 협상 시작. 대우전자 노조 파업 결의

▶1월 21일:대우 김우중·삼성 이건희 회장 회동 "빅딜 조속 매듭 합의"

▶1월 22일:DJ, 이건희 회장 면담. 빅딜 조기합의 촉구

▶1월 23일:DJ, 김우중 회장 면담. 빅딜 조기합의 촉구

▶2월 3일:삼성·대우 구조조정본부장, 빅딜 세부 방안 합의

▶2월 15일:김종필 총리 부산 방문

▶3월 22일:김우중·이건희 회장 회동, 삼성차 인수 잠정 합의

▶3월 24일:삼성차 협력업체, "삼성차 빅딜 수용 못한다"

▶4월 1일:정부, 삼성차 협력업체 민관실사단 파견

▶6월 8일:삼성차 협력업체, 폐업신고 결의

▶6월 30일:삼성차 부도처리 후 법정관리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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