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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發 금융위기 닥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미국발 금융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다.

혹시나 하던 불안감이 미국증시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 각국의 증시로 확산되면서 전세계 주가가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달러값의 추락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유로화는 지난 15일 달러화에 대해 2000년 2월 이후 처음으로 1대1 등가(等價)를 회복했다.

같은해 10월 달러에 대한 유로환율이 유로당 0.82달러까지 떨어졌던 데 비하면 달러값이 1년9개월새 20% 가까이 떨어진 셈이다.

유럽연합(EU)이 유로화의 등가회복을 달가워 하지 않는 것은 이같은 환율변화가 EU의 경쟁력 강화 때문이라기보다 미국경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일본 엔화에 대한 달러값도 15일 달러당 1백15.65엔으로 2001년 2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달러 약세의 시발은 지난해 4월 닷컴 버블의 폭발과 함께 찾아온 미 증시의 대폭락이었지만 지난해 말 불거진 엔론사태와 올들어 터진 월드컴 회계부정 사건은 미국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아시아 외환위기로부터 세계경제를 구했던 미국경제는 이제 그 허상이 무너지며 세계경제를 자칫 동반 침체로 몰고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15일 유럽 각국의 증시는 유로화의 달러화에 대한 등가회복 소식과 함께 일제히 5% 안팎의 폭락세를 보였다. 유로화의 강세가 EU의 수출에 타격을 줄 것이란 예상도 주가 폭락에 한몫했다.

주가하락의 도미노 현상은 시차를 두고 미국 뉴욕 증시와 아시아 증시까지 밀어닥치고 있다.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 지수는 15일 한때 4백포인트 가까이 폭락세를 보이다 장을 마칠 무렵 가까스로 회복됐다. 지난해 9·11 테러사건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이날 오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 "미국경제의 기초가 튼튼하다"며 미국경제에 대한 신뢰회복을 역설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이날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신뢰(confidence)란 말을 무려 일곱 차례나 사용했으나 미국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바로 이 '신뢰'의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당시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보여줬던 시장에 대한 장악력은 찾아볼 수 없다.

16일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위원회(FRB)의장은 의회증언에서 "미국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국면에 접어들었다"며 "더 이상의 악재가 없다면 안정성장의 궤도에 진입할 것"이라고 유례없이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날 뉴욕증시는 개장부터 하락세로 출발해 다우지수가 한때 2백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7일째 계속된 주가하락이다. 불신이 워낙 크다 보니 '신의 손'이라는 그린스펀의 영향력도 약발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선 달러값이 아직도 30% 가량 과대평가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경제의 거품이 아직 덜 빠졌다는 얘기다.

문제는 미국경제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미국경제의 침체를 필두로 세계경제가 순차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마저 거론되고 있다.

미국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주가하락을 부추기고 이는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결국은 기업들의 수익악화와 또 다른 주가하락이란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떨어지고, 기업들은 현금마련을 위해 헐값에라도 물건을 내다파는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 커진다. 그동안 세계경제를 견인해온 미국경제가 이처럼 침체의 늪에 빠지면 나머지 세계경제도 온전할 수가 없다. 심하면 아시아 금융위기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금융시스템의 마비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성급한 진단도 있다.

현재 바랄 수 있는 반전의 가능성은 더 이상 치명적인 회계부정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서 미국의 경제지표가 나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실추된 미국경제에 대한 신뢰를 차근차근 다시 쌓아가지 않고서는 당장 금융시장의 불안한 동요를 단칼에 잠재울 묘수는 없어 보인다.

다만 단기적으로 달러환율의 추가적인 급락사태를 막을 수 있는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호르스트 쾰러 국제통화기금(IMF)총재가 달러화의 폭락이 계속될 경우 공동개입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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