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서 풍기는 '낭만에 대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클래식 음악은 즐겨 들으면서도 현대음악 하면 고개를 내젓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어렵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음악이라고 해서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최근에 발표된 작품일수록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서양 고전·낭만주의 음악의 살과 뼈가 되었던 조성(調性·tonality)에 대한 회귀 현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추세에 힘입어 세계 굴지의 클래식 레이블 도이체 그라모폰(DG)이 최근 '20/21'이란 현대음악 시리즈물을 과감하게 시장에 내놓았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현대음악 전문 음반사를 만드는 것을 '밑빠진 독에 물붓기'쯤으로 여겼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시리즈에 포함된 음반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의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가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와의 협연으로 녹음한 기야 칸첼리(68)의'스틱스(1999년·죽음의 강이라는 뜻)'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72)의'비올라 협주곡'(96년)이다. 두 작곡가 모두 현대음악의 독소(毒素)로 여겨지는 서구식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구바이둘리나는 러시아의 타타르 공화국, 칸첼리는 그루지야 태생으로 모두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글라스노스트(개방)는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이들'숨겨진 보물'을 발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 세계 음악사를 더욱 윤택하게 만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등 러시아 출신 연주자뿐만 아니라 크로노스 4중주단·뉴욕필·시카고심포니 등도 앞다투어 이들의 작품을 위촉·초연해오고 있다.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은 칸첼리를 가리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과도 같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듣고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쉽게 도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낭만주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칸첼리의 말을 들어보자. "음악은 삶 자체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 낭만주의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높은 꿈이다. 높은 곳에 우뚝 솟아있어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미(美)의 힘이기에 무지와 편협과 폭력과 악의 세력들을 정복한다."

낭만주의의 회복뿐만 아니다. 이들에게 음악은 현실과 영계(靈界), 삶과 죽음을 잇는 사다리와 같은 존재다. 이들은 음악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상이나 철학적 개념으로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고대 그리스 이후 음악은 원래 그런 존재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음악이 즉물성(卽物性)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칸첼리의'스틱스'에선 비올라가 합창(삶)과 오케스트라(죽음)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구바이둘리나에게 비올라는 명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이들의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현대인이 잃어버리기 쉬운 영성(靈性)을 되찾아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게 하는 슬픔과 고독과 두려움, 추억과 저항 등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주제들을 다룬다. 바로 칸첼리와 구바이둘리나의 음악이 회복하려는 낭만주의와 신비주의의 힘이다. 음반 발매 2년 만에 전세계적으로 70만장 이상 팔려나간 헨리크 고레츠키의 교향곡 제3번'슬픔의 노래'를 듣고 적잖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칸첼리와 구바이둘리나의 비올라 협주곡으로 음악의 지평을 넓혀 볼 일이다.두 작품 모두 첫 녹음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