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영화풍경] 2004 한국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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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우리는 올해 무엇을 보았나?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강우석 감독)와 그 기록을 금세 깨버린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감독). 그리고 300만명 이상을 기록한 '말죽거리 잔혹사'(유하 감독)와 '어린 신부'(김호준 감독). 올해의 최대 흥행작들이다. 무엇이 우리를 극장으로 끌고 갔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아버지에 대한 전면 부정(否定)'이라고 본다.

'실미도'의 인찬(설경구)은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깡패다. 그는 북한에 파견되는 조건으로 사형에서 풀려난다. 인찬이 모진 훈련을 견뎌내는 힘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다. 빨갱이 아버지만 없었다면 자신의 삶이 달랐을 것 아닌가?

그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아버지의 은유로 '김일성'을 설정한다. 그 사람이 아버지를 빨갱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찬은 "김일성 모가지를 따오겠다"고 다짐한다. 무시무시한 살부(殺父)의 결의에 다름없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형제는 아예 아버지가 없다. 대신 두 형제 사이에 의사 부자관계가 형성돼 있다. 진태(장동건)는 전쟁에서 동생 진석(원빈)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마치 아버지처럼 철저히 '희생'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우리의 보통 아버지들처럼 일방적이다. 뿐만 아니라 잔인할 정도로 비인간적이다. 동생은 살인무기로 변해가는 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동생을 다시 만난 형은 여전히 목숨을 건 희생을 감수하고, 진석은 사지에 형을 혼자 두고 떠난다. 형.아버지를 부정하고, 또 사실상 그를 죽음 앞에 방기해버린 동생.아들은 평생을 죄의식에 사로잡혀 산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권상우)에게 아버지의 상징은 폭력이다. 현수의 아버지는 태권도 사범. 가정에선 아버지에게, 학교에선 선도반 학생에게 현수는 발길질당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폭력.권위에 현수는 반항한다. 현수가 선도반 학생들을 이소룡처럼 깨부수는 장면은 아버지의 권위를 깔아뭉개는 반항의 알레고리다.

'어린 신부'는 16살의 소녀가 대학생 오빠와 결혼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설정에 왜 관객이 그렇게 많이 몰렸을까? 바로 '소녀가 결혼한다'는 설정으로 '아버지의 법칙'을 '가볍게' 위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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