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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주식회사 미국 세계경제 먹구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제록스·월드컴·제너럴 일렉트릭(GE)·IBM 등 세계적인 기업들에서도 그런 혐의가 불거져 나왔다. 나흘 전엔 세계 3위의 제약업체 머크가 1999년부터 3년간 매출을 1백24억달러나 부풀린 것으로 보도됐다. 어떻게 이같은 장부 조작이 미국에서 가능할 수 있었는지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

◇회계법인들의 돈벌이=그동안 미국은 기업 투명성에서 가장 앞선 나라로 분류돼 왔다. 세계적인 회계법인들도 다 미국 회사들이다. 그러나 회계법인들은 고객들(기업)앞에서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직업 윤리를 외면했다. 이들은 지금껏 컨설팅업무도 같이 해왔는데, 기업들의 장부를 감사하는 일보다 컨설팅쪽의 수익성이 배 이상 높았다. 이런 구조 아래서 회계법인들은 컨설팅업무를 따기 위해 본업인 회계감사를 느슨히 해왔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엔론 도산 이후 회계법인들이 잇따라 감사업무와 컨설팅업무를 별도 법인으로 분리키로 한 것은 그동안의 관행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빈번한 인수·합병(M&A)도 한 요인=미국 기업들은 M&A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시도한다. 경쟁력 있는 회사가 다른 기업을 인수하며 덩치를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과정에서 자산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실적이 달라지곤 한다.

월드컴의 경우도 83년 미시시피주에서 지역통신사업자로 출범한 이후 70여차례에 걸친 M&A 과정에서 상당한 회계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기업은 최고경영자(CEO)의 것?=경영학 교과서에 기업은 투자자(주주)의 것이라고 쓰여 있지만 미국 기업들은 CEO의 것이라는 비아냥도 있다.CEO의 역할이 한없이 크고 중요하지만 그 한사람을 위한 혜택이 지나침을 꼬집는 말이다. 일단 최고경영자가 되면 스톡옵션·보너스 등 엄청난 혜택을 놓치고 싶지 않게 마련이다. 실적이 나빠질라치면 회계부정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적 지상주의가 이런 화를 부르는 한 요인이 되는 셈이다. 분기마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성과주의의 노예가 된 CEO들이 관행이란 이름을 빌려 회계법인과 짜고 장부를 부풀린 것이 오늘의 신뢰붕괴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비즈니스 위크지는 '이런 잘못을 저지른 CEO들이 법대로 처벌받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현재 조사를 받고 있는 타이코·엔론·글로벌 크로싱 등의 경영자들이 형사재판을 통해 처벌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망했다. CEO들의 불법행위에 고의성이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유죄판결은 불가능하다.

◇미국식 회계 의외로 취약할 수도=미국의 회계시스템은 좋게 말하면 융통성이 큰 편이다. 불문법 국가라 회계에서도 정부 간섭 없이 기업과 회계법인이 나름대로의 공통 기준을 정하는 것이 기본 정신이다.

회계처리는 민간기구인 재무회계기준위원회(FASB)가 정하는 일반회계기준(GAAP)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기준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업활동을 유연하고 신속하게 분석·평가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다양한 해석도 가능한 면이 있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지금껏 그렇게 처리해 왔다는 관행이 잣대가 되곤 했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머크사의 매출 뻥튀기도 그런 사례로 분류된다.

심상복 기자

지금껏 미국은 자본주의를 꽃피운 나라로 불려왔다. 그러나 최근 유명 대기업들의 잇따른 회계부정 사건은 그 꽃이 향기가 아니라 악취를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투자자들은 이 악취에 고개를 돌리고 미국을 떠나고 있다. 주가폭락과 달러화 가치 하락이 그걸 입증하고 있다. 미국 경제를 믿을 수 없다는 투자자들의 화난 행동인 것이다. 지난해 말 대형 에너지 기업인 엔론의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단발성 사건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후 이어진 회계조작은 그게 아님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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