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난 지자체 첫 모라토리엄] 판교신도시 주민들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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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같아선 이대엽 전 성남시장을 상대로 소송이라도 해서 예산 낭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13일 오후 1시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산운 휴먼시아 아파트. 15층의 옥상 문을 열자 20여m 앞에 6차로 고속도로가 펼쳐졌다. 바로 57번 국지도 우회도로(판교~분당 간 도로)다. 검은색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흰색 트럭을 추월하며 ‘씽’ 하는 굉음을 냈다. 10m가 넘는 방음벽이 설치돼 있지만 굉음은 그대로 귓전을 때렸다.

주민 김모(52)씨는 “이재명 시장이 ‘친환경 방음터널을 설치해 주겠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산이 없다니까 언제쯤 설치가 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쉬었다.

57번 우회도로는 왕복 6차로의 자동차 전용도로로 총 길이가 2.87㎞인데 판교를 가로지른다. 2009년부터 도로 옆에 산운마을 11, 12, 13단지 3000여 가구와 판교원마을 2, 3단지 2000여 가구가 입주하면서 천덕꾸러기가 됐다.

아파트 단지와 고속도로 사이의 간격이 20m가 채 되지 않는다. 도로 높이는 최고 27m로 아파트 9층 높이와 맞먹는다. 고층에 사는 주민들은 도로에서 올라오는 소음을 해결해 달라며 집단민원을 냈다.

이 때문에 이재명 시장은 지난달 지방선거에서 ‘57번 우회도로에 친환경 방음터널 설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시장이 당선된 뒤 주민들은 소음 고통에서 해방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12일 성남시가 판교신도시 조성을 위한 판교특별회계에서 빌려 쓴 돈 5200억원을 단기간에 갚을 수 없다며 지불유예 선언을 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57번 도로 방음터널 설치비용은 판교특별회계의 공동 공공시설 설치비로 충당될 예정이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판교IC~청계요금소 2㎞ 구간의 이전 공사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 됐다. 성남시와 LH는 이 사업에 판교특별회계 1000억원을 배정해 실시설계 입찰공고를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분당~수서 간 고속화도로 지하화 공사도 언제 시작할지 기약할 수 없다. 이 사업 역시 공사비를 판교특별회계에서 조달한다.

판교신도시는 성남시 판교동 일대 9.2㎢에 8조7043억원이 투입돼 조성되는 신도시다. 2014년까지 모두 2만9265가구가 입주할 예정이다. 지난해 입주를 시작해 현재까지 1만7596가구가 입주를 마쳤다. 68%의 입주율이다.

하지만 취임한 지 2주일이 안 돼 지불유예를 선언한 이재명 현 시장에 대한 불만도 제기됐다. 주민 이모(72·판교동)씨는 “이 시장이 ‘쑈’ 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부자 신도시인 판교를 거지 신도시로 만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덕기라는 시민은 “시장 취임 첫 직무가 부도 선언이라는 것이 실망스럽다”며 “채권단과의 협의 등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었나. 땅에 떨어진 성남시의 이미지는 어떻게 할 건가”라며 개탄했다.

공인중개사 박모(39·백현동)씨는 “이 시장이 자금 부족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미루기 위해 지불유예 선언을 한 것 같다”며 “이번 선언으로 판교 개발이 전면 중지될 위기에 놓였는데 누가 판교에서 살려고 하겠느냐. 앞으로 지역경제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주민은 이대엽 전 시장의 처벌을 주장했다. 황성연 성남참여자치연대 사무국장은 “이 전 시장뿐 아니라 예산 낭비를 알고도 묵인한 성남 시의회와 관련 공무원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며 “앞으로는 예산을 편성할 때 주민들이 참여하는 방안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남=최모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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