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머니'의 허상 폭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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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갖고 싶지만 꼭 필요한지" "욕심나지만 갚을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쓰라고 유명 탤런트들이 TV에서 살갑게 충고(?)를 한다. 근검절약 캠페인인 듯싶지만, 알고 보면 신용카드 광고다. 최근 신용카드 연체이용이 연쇄살인사건 등 사회문제로 번지면서 소비자들의 반감을 수습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의 하나인 것이다.

이같은 광고 컨셉의 변화는 우리 사회에도 어느덧 '신용카드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신간 『신용카드 제국:현대인을 중독시킨 신용카드의 비밀』(원제 Credit Card Nation)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에 세워진 그 '제국'의 경제·정치·사회 등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각계 각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폐해를 파헤쳐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경제사회학자인 저자 로버트 매닝(44)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전 사회에 걸친 신용카드 중독현상을 결코 개인의 낭비벽이나 재테크 개념 문제로 희석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용카드 대출 같은 소비자 신용제도야말로 미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마스터카드로 비자카드 빚을 메우며' 사는 많은 미국인들의 생활방식은 사회 이면의 정치·경제적 모순, 금융회사들의 다양하고도 무차별적인 마케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낳은 결과라며, 보다 거시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번 만큼만 쓴다'는 청교도적 경제윤리도 붕괴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무려 15년에 걸친 자료 조사와 수백명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이같은 논리를 입증해보이고 있다.

책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소비자 신용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휴가 중이던 클린턴 대통령이 모르고 사용기한이 끝난 신용카드를 쓰려다가 거절당했던 일화로 시작한다. 이어 미국의 개인(가정)·기업·정부가 '부채의 트라이앵글'에 빠지게 된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을 짚고,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를 분석한다.

그리고 시티그룹 등 80년대 제3세계 외채위기와 부동산 담보대출의 실패로 위기에 몰린 금융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소매금융에 뛰어들면서 신용카드 사용이 급격히 늘었다고 설명한다.

신용카드회사는 제 때 꼬박꼬박 카드사용료를 내면서 각종 서비스혜택까지 받으려드는 중상류층 고객보다는 엄청난 연체비와 이자로 수익을 올려주는 저소득층 고객을 선호한다. 그러면서도 노인과 고아들을 후원한다는 등 인간의 자선욕망을 건드리는 마케팅전략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는 신용카드회사들의 실체도 폭로된다.

이렇게 신용카드에 대한 거시적이고 다각적인 분석이 돋보이지만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한계다. 저자는 다만 연회비·수수료 거부운동 등 해당국가에 맞는 저항운동이 조만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날 것으로 조심스레 전망하고 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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