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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戰場에 핀 백인·인디언의 전우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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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우위썬(吳宇森·54) 감독은 둥글둥글했다. 폭력과 우정, 쌍권총과 비둘기가 어울리는 '영웅본색'(1986년),'첩혈쌍웅'(89년)으로 홍콩 누아르 영화를 열었던 그의 낭만적 이미지와 선뜻 어울리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세례를 받은 탓일까, 모난 것 없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신작 '윈드토커'(다음달 15일 개봉)에 대해 차분히 얘기를 풀어놓았다.

사실 젊은 관객들에게 우위썬은 홍콩 감독보다 할리우드 감독으로 더 친근하다. '브로큰 애로우'(96년),'페이스 오프'(97년),'미션 임파서블2'(2000년)등으로 할리우드에서 단단한 뿌리를 내린 그다. 한국영화의 세계화가 논의되고 있는 요즘 그는 분명 우리가 참고해야 할 '선례'일 수 있다. 미국 메이저 영화사인 컬럼비아사가 한국영화 '실미도'(감독 강우석)에 1백% 투자하고 전세계 배급을 맡겠다는 게 뉴스가 되는 우리와 달리, 그는 이미 10년 전 할리우드의 '초대'를 받고 미국 영화계에 뛰어들어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10년새 할리우드 뿌리내려

"한국 영화계의 에너지는 할리우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한국영화 팬도 생겨나고 있죠. 저도 요즘 나온 한국영화들을 비디오로 간간이 보고 있습니다. 최근엔 '킬러들의 수다'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한가지 당부한다면 할리우드를 모방해선 절대 그들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제가 환대받았던 것은 할리우드가 구현하지 못했던 액션과 비장미, 유머를 한데 섞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 개성과 할리우드의 접목을 기대했던 것이죠."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윈드토커'는 그의 어떤 영화보다 할리우드의 관습에 충실한 영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올 미국 극장가를 점거했던 전쟁영화 '블랙 호크 다운'이나 '위 워 솔저스'처럼 전투장면을 극사실적으로 재연하는 동시에 전장에서 피어나는 인간애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전쟁영화 붐에 편승한 건 아닌지?

"그렇진 않습니다. '윈드 토커'는 다른 영화보다 먼저 기획됐어요. 그리고 이야기 자체가 독특해요. 지금까지 거의 묻혀졌던 나바호 인디언 출신의 암호병을 되살려 냈습니다. 영화의 필요상 스펙터클한 전투신도 상당 부분 삽입했지만 중심은 백인 하사관(니컬러스 케이지)과 인디언 암호병(애덤 비치)의 우정입니다. 저는 전쟁을 지옥으로 생각합니다. 전쟁은 가공스럽고 끔찍한 사건이죠."

그래도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동양 출신의 감독으로서 일본군과 맞섰던 미군의 활약상을 그린 '윈드토커'에 도전한 이유가 궁금했다. 미국식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우려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조금 불안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감독으로선 주저할 게 없었습니다. 최대한 중립적 입장을 취했거든요. 물론 한계도 많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전세계를 겨냥하는 만큼 운신의 폭이 좁습니다. 유럽 쪽은 과다한 폭력을 기피하고, 동양 쪽은 애틋한 드라마를 선호하지 않습니까. 그런 다양한 요구를 할리우드는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감독 자신을 죽이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예전엔 화면 구성·편집 등에 있어 제작자의 간섭이 심했던 게 사실이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며 "출신이 다른 백인과 인디언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차별화된 작품을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차기작 특유의 비장미 재현

대립했던 형사와 킬러가 하나로 뭉치는 '첩혈쌍웅'처럼 '윈드토커'에서도 백인과 인디언은 종국에 형제애로 결합한다.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대명제 아래 각기 다른 출신·배경·피부색이 사이 좋게 악수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형사와 살인범의 정체성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교합한 '페이스 오프' 같은 창의성이 부족한 것 같고, 가장 정치적인 사건인 전쟁을 우정이란 보편적 가치로 가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예전과 다르게 이번엔 다큐멘터리 기법에 많이 의존했습니다. 역사적 호소력을 높이려는 장치였어요. 실감나는 전투신을 위해 들고 찍는 기법도 사용했어요. 물론 전쟁은 정치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것을 뛰어넘는 동료애입니다. 제 개인적 철학, 혹은 소망일 수도 있겠지요. 역사의 비극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윈드토커'는 분명 반전 영화입니다."

그는 "아직도 할리우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히트작을 양산해 권력을 키우려는 제작자들 틈바구니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꾸준히 신뢰를 쌓은 탓에 다음부턴 홍콩에서 보였던 잔혹하면서도 비장한 영상미를 재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프로젝트의 하나로 현재 뮤지컬 갱 영화를 기획 중이라고 공개했다.

차기작 '멘 오브 데스티니(Men of destiny)'에선 '영웅본색'의 저우룬파(周潤發)와 이번 영화의 주연 니컬러스 케이지가 공연하는 만큼 기대를 걸어도 좋다고 덧붙였다. "어린 시절 불우하게 자랐고, 또 영화를 하면서도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아 알게 모르게 남성의 세계를 탐구하게 됐다"며 웃는 그에게서 '솔직한 관록'을 엿볼 수 있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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