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發 악재에 "일단 팔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심리적 공황이 따로 없습니다.일단 팔고 보자는 투매물량이 쏟아졌어요."

주가가 폭락한 26일 여의도 D증권 객장의 한 영업직원은 푸른색 일색의 시세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같이 푸념했다.

G증권 영등포지점의 한 투자자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붉은색(주가 강세를 상징) 물결이 빠져나간 뒤 푸른색(주가 약세 상징) 잔디만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허탈해 했다.

A은행의 자산운용 담당자는 "일단 안전한 쪽으로 돈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주식을 처분하면서 채권을 많이 사들였다"고 말했다.

◇주가·금리·환율 모두 연중 최저=종합주가지수는 700선을, 원화 환율은 달러당 1천2백원선을 겨우 지킨 하루였다.국고채 금리도 올 들어 가장 낮은 연 5.52%를 기록했다.

위험자산인 주식을 피해 안전자산인 채권에 돈이 몰렸다. 채권을 사자는 사람이 많아 값이 오르면 채권 금리는 낮아진다. 또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겠다는 쪽이 많아져 원화가치가 상승하면 환율은 하락한다.

이같은 상황은 무엇보다 뉴욕 주가와 달러가치의 폭락이란 외풍 때문이다.

1분기에 회복세를 보이는 듯하던 미국 경제는 최근 다시 뒤뚱거리며 침체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퍼지고 있다. 소비는 그런 대로 살아나고 있지만, 지난 10년간 장기호황을 누리면서 과잉투자가 심했던 정보기술(IT)부문의 경기가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게 문제다. 굿모닝증권 강신우 상무는 "미국 경제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장기간 과속성장을 거치면서 성장 잠재력을 스스로 갉아먹은 측면이 있다"며 "성장 잠재력과 기업 실적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미 주가와 달러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이 와중에 터진 엔론과 월드컴 등 내로라하는 미 기업들의 회계 부정은 미국 증권시장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까지 불러왔다. 게다가 미국의 뒷마당인 중남미 국가들의 금융불안이 재현되고, 중동의 전운과 함께 미국에 대한 추가 테러 공포가 계속되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 경제는 올 들어 미국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분기에도 6%대의 높은 성장이 예상되는 가운데 기업들의 실적은 호조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국내외 증시의 연결고리 격인 외국인 투자자들의 움직임이다. 교보증권 김석중 상무는 "외국인들은 세계 전체 포트폴리오(자산 배분) 차원에서 한국 증시에 접근한다"면서 "미국 나스닥이 떨어지면 국내 주식도 일단 비중을 낮추는 게 일반적인 투자 패턴"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은 올 들어 이제껏 3조9천억원어치의 한국 주식을 순매도했다.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것도 불운이다. 현재 거래소 시가총액 중 외국인 비중은 36%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주주들의 지분을 제외한 유통물량 기준으로 보면 50%가 넘는 규모다.

그동안 외국인들의 매도에 맞서 주식을 많이 사들였던 국내 기관들도 주가가 계속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손실 규모를 줄이기 위한 손절매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전망은=전문가들은 당분간 미국발 외풍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위험관리에 치중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우리증권 신성호 이사는 "미국 경기 악화와 이에 따른 우리 기업들의 수출 차질 여부 등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가나 금리의 구체적인 바닥수준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현 금융시장의 문제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보다 수급 여건에 따른 것인 만큼 중장기적 관점에선 너무 비관할 것은 없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ING베어링의 목영중 상무는 "한국 기업들의 실적은 3분기에도 좋을 것"이라며 "주가는 결국 기업실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키움닷컴증권 안동원 상무는 "한국의 대미 수출비중이 20% 정도로 줄어 중화권을 합한 것보다 낮아졌다"며 "투자자들이 미국 변수에 너무 과민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흥은행 지동현 상무는 "현 금융시장 여건은 실물경제와 괴리된 면이 있다"면서도 "금융시장이 너무 흔들리면 실물경제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광기·차진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