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속 하반기 한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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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더니, 월드컵 막바지에 경제 비상이 걸렸다. 사상 초유의 월드컵 4강을 자축하는 붉은 물결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주가와 환율이 폭락하고 수출이 급감하는 등 한국 경제에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특히 26일 하룻동안 9·11 테러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주가는 국내외 경제여건의 악화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하반기 경제의 순탄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경제장관 간담회를 거쳐 '하반기 경제운용계획'과 '포스트 월드컵'대책을 내놓았다. 작성 시점과 발표 시점의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정부의 대책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안정적인 균형 성장'으로 설정한 하반기 거시경제 운용 기준부터가 낙관적인 전망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에 하반기 경제운용계획을 발표하면서 당초 4%로 잡았던 올해 경제성장률을 6%대로 높여 잡았다. 물가나 경상수지 목표는 그대로 두면서 성장률만 높여 잡은 이유는 7월부터 수출과 투자가 본격적으로 회복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전망과 대책은 한달 전만 해도 큰 이견이 없는 것이었다. 통계상 비교 시점인 지난해 하반기 지표들이 워낙 나빴던 만큼 대외적인 충격만 없으면 올해는 고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문제는 최근 미국의 경기 회복 부진과 막대한 무역적자, 남미의 경제 위기에서 비롯된 달러 및 주가 약세 등의 파장이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외 요인들은 이미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 주가 폭락과 원화가치 급등, 수출 급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 여건 변화를 보는 정부의 인식에 긴박성이 결여돼 있다는 점은 포스트 월드컵 대책에서도 드러난다. 월드컵 4강을 '경제 8강'으로 이어가자지만, 이를 현실화할 대책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 월드컵으로 떠오른 국가 브랜드를 활용해 수출상품 가격을 10% 올려받자는 대책이 대표적이다. 월드컵 덕에 국가 이미지가 개선된 것은 사실이고,물건값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두달새 원화가치가 이미 10% 가까이 오른 데다 정부 대책대로 다시 10%를 더 올릴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수출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이런 대책은 5년 전 외환위기 직전에 정부가 구조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10% 경쟁력 향상'만을 외쳤던 전례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시장 지표에 일희일비하는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는 낙관 일색의 정책은 훨씬 더 위험하다.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금융·실물 양면에서 대외 의존도가 훨씬 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반기 경제운용에서 외부 충격에 대처할 위기관리 기능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 특히 환율과 금리 등 거시변수의 운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추구하면서 물가상승 압력에도 적절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부실 기업과 부실 가계대출 등에 잠복한 내부 부실 요인을 털어내면서 월드컵으로 다소 해이해진 사회적 분위기도 추스를 필요가 있다. 여당이 없어진 상황에서 대선도 치러야 하는 만큼 정치권의 협조 역시 긴요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국 경제가 살아남아야만 월드컵 성공의 결실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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