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철통 포백 수비벽 못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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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독일의 변화된 수비전술을 깨지 못한 점과 상대의 기습에 말린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독일팀은 준결승전까지 채택했던 3-5-2 전형을 버리고 4-4-2(때로는 4-4-1-1) 포메이션을 가동하며 한국전을 철저히 준비했다. 스리백 시스템에서 포백 시스템으로 바꾼 러 감독은 자신의 색깔을 버리고 한국의 전술에 대응했다. 객관적인 전력이 앞선 팀이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는 것이 통례인데 러는 한국을 이기기 위해 과감하게 전술적 변화를 꾀했다.

포백으로 측면수비를 강화한 독일 수비진은 8강전, 16강전 때 보였던 허술함을 단 한차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한국은 이천수와 차두리를 선발로 기용, 측면 돌파에 이은 골찬스를 만드는 공격전술을 준비했지만 독일의 좌우측 풀백 메첼더와 프링스의 대인방어에 막혔고, 이 현상은 전후반 내내 공격의 활로를 찾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승부의 분수령은 전반 20분까지였다. 러 감독이 자존심(?)을 버리고 수비를 강화한 작전은 한국의 기세를 의식한 것이었다. 전반 초반 독일은 다소 위축됐고, 이 상황에서 차두리의 돌파, 이천수와 박지성의 슈팅 등이 이어졌지만 이 찬스를 살리지 못해 아쉬웠다.

전반 중반까지 서로 치고받는 양상이었지만 독일은 전반 종반부터 공격을 강화하는 전술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공격시 포백에서 스리백으로 전환하며 볼에 가까운 사이드 풀백 중 한명이 미드필드 쪽으로 전진하며 허리를 강화하자 한국은 큰 혼란을 겪었다.

미드필드에서의 혼란은 많은 코너킥과 골마우스 지역에서의 프리킥을 내줘 수비에 부담이 가중됐다.

한국은 후반 들어 체력·전술, 그리고 정신력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지만 단 한차례 뇌빌의 빠른 외곽 침투에 허물어졌다. 뇌빌을 적극적으로 차단하지 못한데다 센터링 때 문전쇄도하던 발라크를 중앙 수비수가 놓친 것이 통한의 실점으로 연결됐다.

이 골이 터진 시간이 후반 30분이었고, 히딩크는 공격을 강화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홍명보를 빼고 설기현을 투입해 막힌 공격의 활로를 개선하고자 했지만 러 감독의 맞불작전에 실패로 끝났다. 러 감독은 강공으로 맞받아쳐 한국 수비수들의 공격 가담을 막았다.

당초 걱정했던 체력 고갈은 비온 뒤 떨어진 기온과 23%대의 적정한 습도, 또 야간경기의 이점까지 겹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후반 90분간 한국팀은 뛰어난 기동력을 보여줬고, 전반 초반 한때 경기를 지배하는 놀라운 파이팅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좋은 상황에서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어쨌든 패배는 현실이고 이제는 3,4위전을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승 진출은 좌절됐어도 4강 위업을 달성한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은 우리 국민의 영웅이다. 마지막 경기까지 최선을 다해 한국 축구의 미래와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는 성숙한 모습을 기대한다. 잘 싸웠다.

<중앙일보 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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