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말처럼'제2의 이름'짓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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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오랜만에 화단의 물망초를 살펴보았다. 꽃말이 뭐였더라? 아, 그러다 이내 애틋해졌다. 물망초의 꽃말은 여느 꽃말이 그렇듯 신화에서 나왔다.

기사 루돌프와 아름다운 아가씨 펠타는 어느 날 다뉴브 강을 거닐다 처음 보는 꽃을 발견한다. 펠타를 위해 꽃을 꺾으려던 루돌프는 그만 강물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다. 마지막 순간 꽃을 던지며 루돌프는 외친다. "나를 잊지 마세요!"

물망초를 보면서 마음이 애잔한 것은 바로 이 꽃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인이 목숨과 바꾼 꽃을 보는 펠타의 심정은 어땠을까. 신화는 이렇듯 언제나 사물의 존재를 은유적으로 알려주는 비밀의 문이다. 말하자면 '존재의 설명서' 같은 거다. 꽃말을 알고 나니 물망초가 사랑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남자로 보인다. 알고 나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드라마 작가인 나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결정하는 일이 가장 큰 고역이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 인물의 성격을 설정한다. 어떤 상황에도 강하게 살아남는 남자와 부잣집 딸이지만 마음은 여린 여자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면 이들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생각나는 대로 '김철수'와 '박영희'로 결정했다. 김철수와 박영희, 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 이름에선 어떤 향기도, 어떤 은유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듯 현대의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은 그저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기호일 뿐이다. 이름 자체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어쩌면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의 이름은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신화의 꽃말처럼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떨어져 나오고 대중 사회 진입으로 개인의 다양성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기호로 된 이름을 부여받으며 자신만의 신화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자연과 가장 가까이서 살아가는 인디언들은 아직도 개인의 신화를 간직한 이름을 지키고 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늑대와 춤을'이라든가 '주먹 쥐고 일어서' '작은 나무' 같은 이름은 그들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도 그들을 닮으면 어떨까. 건축 공부를 하는 내 남편의 이름은 그의 소원대로 '마음에 집 짓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항상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내 친구의 이름은 '세개의 귀를 가진 사람'으로 명하고 싶다. 두개의 귀 외에 마음의 귀를 더 가졌으니 말이다. 길에 지나가는 잡종개를 보면서도 "예쁘다"를 연발하며 쓰다듬는 옆집 유치원생 남자 아이는 '사랑을 캐는 광부'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의 선전을 보면서 선수들에게도 이름을 지어봤다. 골을 넣을 때마다 아내를 위해 반지에 입을 맞추는 안정환은 예전 별명과 합친 '꽃을 든 반지의 제왕'이면 근사하다.

히딩크 감독은 무슨 이름이 어울릴까. 네티즌들이 만든 이름 '희동규', 즉 '동방에 기쁨을 준 별'로 불러도 좋겠고 우리 국민에게 그가 해준 것처럼 '꿈을 실현시켜준 메시아'라고 해도 무난할 것 같다.

각자에게 아름다운 꽃말을 붙여주면 축구 중계도 지금보다 훨씬 재밌어질 것 같다. "네! '꽃을 든 반지의 제왕'이 '바람의 아들'에게 패스, 그 공을 받아 '왼발의 달인'이 차넣습니다. 앗, 파울입니다. '동방에 기쁨을 준 별'이 항의를 하는군요."

인간미가 점점 사라지는 시대다. 내 이름이 가끔씩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땐 수십년간 갖고 다니던 이름 대신 새 이름을 지어주자. 자신의 개성이 뭔지, 평소 버릇은 어떤 것이 있는지, 남들로부터 무슨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종이에 적어본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꽃말을 지어보는 것이다. 친구들과 모여 서로에게 이름을 지어줘도 좋겠다. 서로의 몰랐던 부분을 좀더 알아가며 새록새록 정이 들 것이다.

그리고 새로 지은 '꽃말'을 주변 사람에게 알리자. 내 이름을 못 외던 사람들도 쉽게 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비즈니스 맨이라면 명함에 적어놓아도 좋을 것이다. 일에 한정됐던 대화의 폭이 좀더 넓어지게 될 것이다. 자, 모두 자신의 이름을 지어보자. 나를 돌아보면서 어느덧 나를 사랑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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