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스틱사랑 나이를 날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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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지난 15일 해질녘의 토요일 오후. 서울 안암동 고려대 뒤편 아이스링크로 머리가 희끗한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남자들이 묵직한 가방을 둘러메고 하나 둘씩 모여든다.

라커룸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8시부터 시작될 연습을 앞두고 벌써 장비를 착용하느라 바쁘다. 이날은 40세 이상 아이스하키 동호인들의 모임인 '폴라베어스(북극곰)'의 정기 연습일이다.

한쪽에선 팀내 최연장자(63세)로서 골키퍼를 맡고 있는 김중호 신부가 무거운 장비를 메느라 연신 끙끙댄다.

몸무게 86㎏의 金신부가 착용하는 장비는 헬멧과 마스크·가슴막이·어깨막이·무릎보호대 등을 합쳐 모두 20㎏.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에 서면 1백㎏이 넘는다.

경기고 아이스하키팀 선수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다시 신학대에 들어가 지금은 강남성모병원 부원장이자 원목(院牧)으로 일하는 金신부는 매주 연습에 한번도 빠지지 않는 열성 회원이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물론 힘들지…"라면서도 "이게 없으면 살 맛이 안난다"며 웃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격렬한 스포츠에 속하는 아이스하키. 오늘은 그 격렬함의 매력에 흠뻑 빠진 폴라베어스 회원 21명과 회원의 자녀 4명 등 모두 25명이 연습에 나왔다.

金신부를 포함해 세 명이 번갈아 골키퍼를 보기로 하고, 나머지 22명을 두 팀으로 나눴다. 각 팀은 다시 두 조로 나뉘어 3분 간격으로 교대해 뛰기로 했다.

선수들은 장철(52·원현주택 사장)주장의 지시에 따라 몸을 풀기 시작한다. 날렵하게 링크를 몇 바퀴 돈 뒤 개인 드리블, 슛, 2대 1 패스 훈련이 이어지면서 얼음판엔 서서히 열기가 달아오른다.

이제 경기 시작이다.이날 심판은 박병무(50·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원장)회원. 최근 눈 수술을 하는 바람에 선수로 뛰지 못하고 심판을 맡았다. 대신 선수로 출전한 아들 희인(13)이 열심히 뛰어주길 바라며 아쉬움을 달랜다.

밖은 초여름 날씨로 무덥지만 실내 링크에는 회원들의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차갑다. 그러나 3분 만에 교대돼 들어온 김자호(57·간삼종합건축 대표) 회원의 백발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얼굴엔 벌써 땀방울이 흐른다.

"저 친구 살 좀 빼야지. 저렇게 둔해서야…."

"저 형 요새 술 안마시나 봐요. 펄펄 나는데요."

"야!, 거기서 센터로 줘야지." 대기석에선 응원과 야유가 한창이다.

한 쪽 골대는 아직 기준 나이(마흔)에 미달해 준회원으로 초빙된 국가대표급 실업선수인 이동호(35·동원드림스)씨가 막고 있다. 李씨가 골대를 탄탄하게 지키는 사이 상대편엔 이미 세 골이나 들어갔다.

李씨의 골대가 드디어 열렸다. 이수흥(56)회원이 어설프게 친 퍽이 흐물거리며 골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李회원은 "저 골키퍼한테 처음 골을 넣어봤다"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한다.

그러나 대기석의 해설은 야박하기 짝이 없다. "정상적으로 안 맞아서 들어갔지, 제대로 슛을 쏘면 다 막아낸다니까."

박병권(58·SM 대표)회원이 앳된 얼굴의 박희원(성남외국인학교 7학년, 중1)과 부딪쳤다. 희원이는 朴회원의 조카다. 대기석에선 즉시 "어이, 애를 누르면 되나"라며 야유가 터져나왔다.

교체된 朴회원은 "쟤가 무슨 애야. 어른보다 훨씬 잘 하는데"라고 항변했다. 이날 희원이는 두 골을 넣었다.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에서 잠시 살았던 희원은 한국에 돌아와 학교에 팀을 만들 정도로 아이스하키에 푹 빠져 있다.

밤 10시에 연습경기가 끝났다. 회원들의 경기복은 모두 땀에 절었다. 그러나 기분만큼은 날아갈 듯하다.

연습이 끝나면 곧바로 귀가하는 게 폴라베어스가 정한 원칙이다. 정운익(59·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회원은 "땀흘린 뒤 시원한 맥주 한잔 하는 맛이 없어 아쉽다"고 늘 투덜거리지만 규칙은 규칙이다.

폴라베어스는 대신 두달에 한번씩 삼겹살과 소주로 친목을 다진다.

폴 라베어스는 1987년 2월 고려대 뒷산에 야외 아이스링크가 만들어지면서 경기고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20여명이 '경기 올드타이머'를 조직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선수가 부족해 고려대 선수출신을 영입하고, 이어 선수경력이 없는 회원까지 끌어들이면서 팀 이름을 '폴라베어스'로 바꿨다.

회원의 대부분이 고등학교나 대학시절 선수 생활을 했지만 백광우(49·치과의사)·신상혁(49·언더그라운드 사장)·박병일(48·상오와 병일 대표)·박성업(48·사업)회원 등은 선수출신은 아니지만 그저 아이스하키가 좋아 참가한 순수 아마추어다.

폴라베어스 최령자 3인방은 재일동포인 정대화 단장과 金신부, 백홍빈 회원으로 63세다. 만 40세 이상 정회원 37명 중 21명이 쉰을 넘긴 나이에 땀을 흘리고 있다. 허광수(57·삼양인터내셔널 회장)·유명(56·태산인터내셔널 대표)·김영환(53·사업)·김두경(53·한국은행 공보실장)·김연호(51·삼화제지 대표)·최영석(50·나이키스포츠 마케팅부장)·최인선(50·대신투신운용 이사)·한덕규(50·외국어대학 교수)·김승조(50·사업)회원 등 각계의 중진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고려대 아이스링크장 총무인 이중우(44)회원은 총무로서 궂은 일을 도맡고 있다.

회원 가운데 金신부와 김자호씨는 형제고, 박병권·병무·병일씨는 3형제가 회원인 데다 이들의 자녀까지 합하면 한 집안 8명이 폴라베어스 가족을 이루고 있다. 몽골인인 박장길(한국명·42·사업)·캐나다 동포인 윤오식(48·컨설턴트) 회원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팀 출범 후 매주 한번씩 연습하다가 고려대 아이스링크를 전용 링크(?)로 확보한 뒤엔 매주 두차례로 모임이 늘었다. 수요일엔 다른 아이스하키 동호회와 경기를 하고 토요일엔 회원끼리만 연습한다. 일주일에 두번씩이나 모이는 데도 매번 20여명의 회원이 꼬박꼬박 참석한다.

이제는 팀의 관록도 붙어 40세 이상만 참여하는 아시아권의 올드타이머 대회에선 최강팀으로 군림한다. 97년 한·중·일 친선 올드타이머 대회에서 우승했고, 매년 정기적으로 여는 일본 올드타이머팀과 교환경기에서도 거의 지는 법이 없다.

아이스하키의 매력에 대해 2000년부터 주장을 맡고 있는 장철회원은 "술독을 빼내는 데는 아이스하키가 최고"란다. 김두경 회원은 "아이스하키를 거른 주에는 온 몸이 찌뿌둥하다"며 "두시간 땀흘리고 나면 사나흘은 머리가 개운하다"고 아이스하키 예찬론을 폈다.

창립 멤버로 99년까지 주장을 맡았던 정운익 회원은 "거칠고 힘들지만 가장 남성적인 운동이라는 게 아이스하키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이세정 기자

한번 세게 때리면

시속 150㎞까지

날아가는 '퍽'.

부상 많기로 소문난

운동이다.

중년 나이에

감당하기 벅차보이지만

회원들의 '스틱사랑'은

젊은이들 못지않다.

매주 두번하는 연습에도

20명 이상이 꼬박꼬박 참석.

아시아권 중년팀 중

최강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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