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현대그룹 vs 채권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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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현대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이 올 상반기 거둔 좋은 실적을 토대로 새로운 재무구조 평가를 원하고 있다. 사진은 현대상선 소속 컨테이너선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으며 바다를 헤쳐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현대그룹과 채권은행들의 갈등이 일촉즉발이다. 현대그룹이 재무구조 개선 약정 체결 시한을 넘기면서 은행은 더 이상 신규 대출을 해주지 않겠다며 금융제재를 선포했다. 현대그룹은 주채권은행을 바꿔 달라며 맞서고 있다.

한편에선 순조로운 구조조정을 추진하도록 지도해야 할 금융당국이 경직된 기준을 운용하는 바람에 양측의 갈등을 더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와 금융계는 비슷한 사례가 재발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채권단 - 기업 소통 부재가 큰 문제

금융·기업 전문가 시각은

금융·기업 전문가들은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둘러싼 현대그룹과 채권단의 마찰이 시장에 미칠 파장에 주목하고 있다. 현대그룹처럼 채권단의 결정에 반발하는 제2, 제3의 사례가 나올 경우 구조조정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금융권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추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제재를 받는 기업도 경영 부담이 크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당국의 기업 구조조정에 관여했던 이성규 연합자산운용 사장은 “기업들이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정당한 법 집행이 아닌 금융권의 담합행위로 받아들일 경우 현대그룹과 유사한 사태가 또 빚어질 수 있다”며 “그 경우 금융권 주도의 구조조정이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기회에 기업의 재무구조를 평가하는 방법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재무구조의 평가 방법이 지금과 같은 경기 회복기엔 맞지 않는다”며 “현실에 맞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금융당국은 재무구조 평가 항목이 부채비율 중심의 재무지표에 지나치게 치중돼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일부 평가 항목을 수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채비율 등 재무지표가 구조조정 대상 여부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배 본부장은 “항공·조선·해운의 경우 업종의 특성상 부채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게 재무구조 평가엔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며 “금융위기로 일부 사업이 어려웠지만 최근 회복세를 타고 있는 현대그룹의 입장에선 채권단의 구조조정 계획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무지표만으로 기업을 옥죄다 보면 경기 회복기에 시장 선점을 위한 공격적인 경영활동이 어려워지고, 이는 다시 재무구조의 부실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부른다는 얘기다. 예컨대 항공사의 경우 보유 항공기를 팔면 당장은 부채비율을 낮출 수 있지만, 자칫 정상적인 영업 자체가 어려워질 위험도 있다.

채권단과 기업 간의 소통 부재를 원인으로 꼽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원한 금융 전문가는 “채권단은 법대로 하겠다는 주장을, 기업은 특수한 사정을 채권단이 고려하지 않는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기업이 채권단의 주장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그런 구조조정이 잘 될 리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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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는 “구조조정 기업을 발표하기에 앞서 대상 기업이 자신의 현황을 채권단에 숨김없이 보여주는 기업설명회(크레딧 IR)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물론 지금도 구조조정 대상 기업과 채권단이 사전 조율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재무지표가 우선시되다 보니 기업의 특수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사전 조율이라고 하지만 자산매각과 같은 구조조정의 방법을 논의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정조 대표는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발표하기에 앞서 충분한 크레딧 IR 기회를 가진 뒤 다시 평가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전성인(경제학) 홍익대 교수는 “현대그룹의 주채권은행 변경, 채권단의 금융제재 등은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기싸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다만 시간을 오래 끌면 양측이 모두 피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준현 기자



“약정 계속 거부하면 기존 대출 회수할 수도”

강경한 채권단

“제재까진 안 가길 바랐다.”

8일 현대그룹에 대한 금융제재 방침을 정한 채권은행 관계자의 얘기다. “현대그룹이 이렇게까지 거부할 줄은 몰랐다”고도 했다. 과거에도 기업의 반발로 재무개선약정 체결이 몇 개월 늦춰진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채권단이 제재에 나선 건 처음이다.

채권단은 당초 지난달 15일이던 체결 시한을 세 차례 연장해 이달 7일로 늦췄다. 하지만 네 번째 연장은 없었다. 대신 신규 여신 중단이란 강공법을 택했다. 현대그룹 계열사에 대한 신규 대출은 물론 지급보증, 선박금융 등을 모두 끊겠다는 것이다. 단, 9개 계열사 중 금융회사(현대증권·자산운용·투자네트워크)는 소비자의 피해가 우려돼 대상에서 빠졌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이번 제재는 약정 체결을 촉구하기 위한 부득이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그룹이 계속 거부하면 더 강도 높은 제재를 취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만기가 돌아온 채권 연장을 해주지 않거나, 기존 대출을 회수하겠다는 거다.

“주채권은행을 바꿔 다시 평가받겠다”는 현대그룹 주장에 채권단은 회의적이다. 익명을 원한 외환은행 관계자는 “이미 시험을 다 치렀는데, 혼자 6개월 더 공부해 다시 시험 보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다른 기업과의 형평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채권단 일원인 산업은행 관계자도 “주채권은행을 바꾸려면 채권단의 동의와 금융감독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둘 다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대그룹은 지난달 400억원의 빚을 갚긴 했지만 아직도 외환은행에 1500억원가량의 여신이 남아있다. 외환은행으로선 현대그룹이 이를 다 갚기 전엔 주채권은행을 바꾸는 데 동의해줄 이유가 없다.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지난해 썼던 각서 내용도 약정 체결의 근거로 제시한다. 현대그룹은 이미 지난해 8월 상반기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한 경영평가에서 재무개선약정 체결 대상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채권단은 “연말까지 실적이 개선되지 않으면 2010년에 약정을 체결하겠다”는 현대그룹의 각서를 받고, 약정체결을 유예해줬다. 이번엔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게 채권단의 입장이다.

지난해엔 한진그룹이 평가에 강하게 반발하다 약정을 체결한 바 있다. 당시 한진그룹은 2008년 말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한 평가에서 ‘재무약정 체결 대상’ 판정을 받았지만 항공·해운업종의 특성을 감안해 약정체결을 유예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상반기 평가에서 또다시 체결 대상에 들어갔고, 결국 두 달 넘게 끌다 11월 약정을 맺었다.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약정체결을 강하게 거부하는 이유가 현대건설 인수전에 있다고 분석한다. 재무약정을 체결하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뒤따른다. 이때 현대그룹은 몸집을 줄여야 하므로 현대건설 인수에서 멀어질 수 있다.

외환은행은 약정체결과 현대건설 인수 참여는 별개라는 입장이다. 이 은행 관계자는 “현대그룹이 약정을 체결한다고 해서 현대건설 인수에 참여하는 걸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약정체결을 거부하는 현대그룹의 논리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익명을 원한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기업이 약정체결을 거부하고 재평가를 주장하는 건 재무평가 제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또 “은행권이 공동으로 만든 평가준칙에 따라 재무평가가 이뤄진 만큼 다른 은행으로 간다고 점수가 바뀔 순 없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채권단 결의 강행하는지 보고 대책 세울 것”

꿈쩍 않는 현대그룹

기업이 돈줄을 쥐고 있는 금융권과 각을 세우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현대그룹이 채권단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이례적 이다.

현대그룹은 8일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등 채권단이 재무구조개선약정(MOU) 체결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신규대출 중단을 결정한 데 대해 “우리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현대그룹의 입장은 ‘외환은행의 대출금을 모두 갚고 주채권은행을 변경하겠다’는 것이다. 또 “실제로 채권단이 결의대로 하는지 보고 대책을 논의하겠다”고 덧붙였다.

속내야 어떻든 현대그룹이 애써 담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채권단과 벼랑끝 승부를 하는 것은 현금 유동성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 대출의 만기상환만 이뤄진다면 신규 대출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들기 위해 수년간 약 1조2000억원대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했다. 이 자금에는 국내 금융권에서 빌린 것도 있지만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 해운 호황기 당시 쌓아둔 돈과 회사채 발행으로 조성한 게 포함된다. 현대상선의 회사채는 올 4월 신용평가사인 한신정평가(NICE)로부터 ‘A’등급 평가를 받았다.

현재 국내 금융권으로부터 빌린 여신은 1조5000억~2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만약 채권단이 신규 대출 중단에 이어 기존 대출의 환수에 나선다고 가정한다면 현대그룹은 확보한 현금 외에 3000억~8000억원의 추가 자금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3000억~8000억원은 현대상선이 보유한 선단 50여 척 중 서너 척을 팔면 마련할 수 있고, ‘세일즈앤리스백’ 형태로도 빌릴 수 있는 자금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엔 세계적인 해운 불황으로 멀쩡한 대형 컨테이너선이 1000억원 이하에 매물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올해는 해운 시황이 좋아졌다. 다시 2000억원대로 가격이 올랐고, 일부 초대형 고가 선박의 경우 3000억원대를 바라보는 상황이다. 현대상선이 1분기 공시 기준으로 발주한 선박도 국내 대기업이 전용선으로 사용할 벌크선 3척 정도다. 잔금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2006년부터 2500억원을 투자한 부산신항 터미널도 지난달 완공했다. 국내외 10여 개의 선사도 이 터미널을 이용할 예정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4월 1일 발표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재무현황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 현대그룹의 부채비율은 297.3%로 나타났다. 금융계열사를 제외할 경우 부채비율은 246.2% 수준이다. 그룹 전체 부채비율이 높다고 하기도, 그렇다고 낮다고 하기도 애매한 수준이다.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중 금호아시아나(405.7%), 한화(481.1%), 동부(439.1%), 삼성테스코(1064.7%), 동양(870.4%)보다 양호하다. 대북사업을 맡고 있는 현대아산이 그룹의 아킬레스건이기는 하지만 이 회사의 매출 비중은 그룹 전체의 1~2%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채권단의 신규 대출 중단 결정으로 현대그룹의 염원인 현대건설 인수에는 쉽지 않은 행보가 예상된다. 현대건설을 인수하려면 3조~4조원의 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그룹은 이미 확보한 1조2000억원 외에 추가로 자금을 모아야 하는데 국내에서 대출받기는 사실상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 지분을 7.22%(보통주 기준) 보유하고 있다. 이 지분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현대그룹 전체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현대그룹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현대건설이 갖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현대건설 채권단이 명확히 밝혀야 현대그룹과 채권단이 벌이고 있는 대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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