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측 3백여명 평양 한복판서 예배 北,방해 않고 5시간 지켜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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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4일부터 18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던 한민족복지재단(이사장 崔弘俊·부산호산나교회 목사)의 방북단은 남북관계사에 보기 드문 기록과 장면을 연출했다.

우선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민간인 2백97명이 무비자 상태로 직항로를 이용해 북한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남북 연합예배를 위한 방문 목적이 충족되지 않자 3백여 남측 기독교인들이 평양 중심부의 고려호텔에서 예정에 없었던 금식기도를 했던 것도 특기할 만하다.

그럼에도 북측이 물리력을 전혀 동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배진행을 방해하지 않는 신축성을 보였다. 특히 방문단의 입출국시 짐검사를 생략하는 등 북측의 유연한 자세는 방북단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재단측과 북측이 연합예배와 관련된 합의문의 해석을 놓고 이견을 보여 일정이 완전히 무산될 뻔했던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온 것이나 초유의 고려호텔 예배사단이 터졌던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北, 무비자 방문 허용

○…지난 16일 오전 7시 평양 고려호텔 3층의 3백여평 규모의 대식당. 남북 연합예배를 드리기 위해 방북한 기독교인들로 꽉찬 대식당은 긴장감이 팽팽했다.

당초 이날 오전 10시 평양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열기로 한 연합예배는 물론 주일예배 자체가 북측의 거부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崔이사장은 회원들에게 "기독교인들에게 주일예배는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며 금식을 제안했고, 회원들은 즉각 혼연일체가 돼 기도에 들어갔다. 상당수 회원은 식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통성기도를 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처음으로 평양 심장부에 기도와 찬송이 울려퍼진 것이다.

동행했던 몇몇 비기독교인이 "북측 체제의 속성상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지만 崔목사는 "아리랑 공연 문제를 갖고 우리가 양보했는 데도 불구하고 북측은 약속을 어겼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하루종일 예배를 보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같은 돌발사태가 벌어지자 식당 의례원(접대원)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한 의례원이 "그동안 남조선 사람들이 많이 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입네다. 그런데 저렇게 해서 통일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며 불만을 표시했으나 의례원들은 매우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북측 당국자들은 일요일 이른 아침 방문단의 기습행위에 당혹했다. 그들은 우리측에 예배중단을 요구했지만 예배 진행을 강제로 저지하지는 않아 물리적 충돌 가능성을 피하는 슬기로움을 보였다. 위협적인 언동도 하지 않았다.

부산개금교회 박성호 목사는 "북한에 와서 이렇게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하다"며 "예배를 방해하지 않은 북측의 태도가 놀랍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예배는 장장 다섯시간이나 흐트러짐 없이 계속됐다.

호텔식당서 즉석 기도회

○…발단은 북측 초청자인 중국 베이징(北京) 소재 범태평양조선민족경제개발촉진협회(범태)와 재단측의 방북 합의문을 둘러싸고 재단측과 북측 당국간에 빚어진 이견 때문이었다.

재단과 범태측이 당초 합의한 '16일 남북 연합예배'를 놓고 북측 당국은 "범태는 공화국의 공식단체가 아니므로 범태와의 합의내용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아리랑 축전 참가를 위해 초청장을 발부했으니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비자를 내줄 수 없으므로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이 때부터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방북단의 호텔 밖 외출도 금지됐다.

북측 관계자는 "방북단이 비자 없이 북한 땅을 밟았으므로 정식 입국자 신분이 아니며, 따라서 호텔밖 출입을 허용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양측의 타협안이 나온 것은 15일 오후 4시쯤.

재단측이 '연합예배가 이뤄진 후 희망자에 한해 아리랑공연 관람을 허용한다'는 입장에서 후퇴, 15일 저녁 희망자에 한해 관람을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북측은 16일 새벽 돌연 태도를 바꿔 "일요일에 예배를 보지 말고 묘향산 관광이나 하라"고 제안했고, 이에 격분한 재단 측이 금식기도로 맞섰던 것.

이와 함께 재단측은 귀환하기 위해 서울에 전세 비행기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취하면서 항공권을 모으는 등 강경조치를 취했다. 이에 북한 측이 일요일 오후 일정부터 정상화를 제시해 일단 갈등을 봉합시켰다.

양측 모두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면서도 자제력을 발휘한 결과였다.

평양=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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