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 대재앙] "해변에 있던 사람 호텔까지 쓸려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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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태국 푸켓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지치고 놀란 모습이었다. 이들이 전한 푸켓의 광경은 공포의 도가니였다. 일부 승객은 취재진이 귀국하는 어린이에게 다가가자 자녀가 그때의 악몽을 떠올릴까봐 인터뷰를 가로막기도 했다. 이날 하루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푸켓항공을 통해 인천공항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827명이었다.

◆ 아수라장이 된 현지 호텔="푸켓 마린비치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쯤 갑자기 해일이 호텔을 덮치더니 1~2층을 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겨울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김성국(40)아시아나항공 부기장의 전언이다. 그는 "밀려온 물살이 얼마나 거셌던지 해변에서 놀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쓸려와 (호텔)기둥 여기저기에 부딪쳐 아우성치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대한항공 KE 638편으로 돌아온 박주원(17.여.재미동포)양은 "아침에 식당에 밥 먹으러 내려가는데 물이 들이닥치더니 (파통비치)호텔에 있던 사람들을 휩쓸었어요. 소리 지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어린이나 노인은 자다가 당했는지 아무 움직임도 없이 둥둥 떠다녔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들이 느낀 공포는 극에 달했다. 박준성(11.서울 무학초등 4년)군은 "물이 호텔에 차서 탁자가 쓸려내려가고, 의자와 오토바이가 거리에 둥둥 떠다녔어요. 귀신이 나올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박군은 "할머니가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도 떠내려가서 가족을 못볼 것 같았고요"라며 몸서리쳤다.

◆ 공포의 해변.공항=신혼여행을 다녀온 이기태(36).홍민자(29)부부는 "물살이 한번 쓸고가자 해변의 야자수가 무너지고 폭격 맞은 듯 웅덩이가 파이고… 그런 상황이 30분은 계속됐다"고 했다.

파통비치 인근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해변의 해일을 목격한 유지연(25.여)씨는 "멀리서 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파도의 높이가 6~7m는 되는 것 같았고, 삽시간에 모든 것을 삼켰다"고 전했다. 해일이 닥칠 당시 피신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사람도, 대처 방법을 안내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해변과 리조트에 있던 여행객들은 뿔뿔이 흩어져 산으로 무조건 내달렸다고 했다. 서승범(32.경기도 부천시)씨는 "도로가 차단된 건 물론이고 휴대전화와 전기 등이 모두 나가 고립 상태였다"고 했다.

푸켓항공을 타고 귀국한 이명성(64.인천시 구월동)할머니는 "심장이 떨려 지금도 말이 안 나온다"고 했다. 그는 해일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6일 오후 9시30분에 공항에 도착해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1시간 뒤 갑자기 공항 직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넘어지고 밟히고…. 공항에서 죽을 뻔했어요."그는 20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활주로가 침수된다는 소리를 듣고 공항 직원들이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더라고요."(전영철씨.29)

"공항의 태국인 직원들이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대피하라는 안내방송도 없이 '총리가 들어와 비행기를 통제한다'는 엉뚱한 말만 하고는 먼저 도망쳤어요. 나중에야 가이드로부터 '푸켓 중심부에 해일이 일어나 피하라'고 해서 대피했습니다."(유병조씨.42)

◆ 한인 피해 전언=한국인의 피해를 증언하는 사람도 잇따랐다. 관광객 박혜영(33.여)씨는 "H투어 등에서 인솔한 한국인 관광객 100여명 정도가 해일이 덮치기 전날 피피섬으로 갔었다"며 "상당수가 해일에 휩쓸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김영완(25.경기도 안양시 안양1동)씨도 "시내에 있어서 상황을 보지는 못했는데 현지 가이드 얘기로는 한국인 피해가 많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박기엽(61.서울 상왕십리)씨는 "비도 안 오고 해서 해변으로 나가 산책하다 호텔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물이 들어왔다"며 "순간 파라솔과 호텔 집기가 물 위에 떠다녔다"고 아찔했던 순간을 소개했다.

그는 "호텔 앞에 높이 2m의 둑이 있었는데 (물살이) 그걸 훌쩍 넘더니 그대로 덮쳤다"며 "우리 호텔에서 같이 묵던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바닷가에서 마사지하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해일이 덮친 직후 푸켓공항에선 현지 한국인 가이드들이 한국 본사와 통화하면서 "여기 (푸켓)리조트가 모두 엉망이니 사람을 받을 수 없다. 더 이상 여행객을 보내지 말라", "일부 관광객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면서 다급하게 말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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