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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26) 1군단장 복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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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유엔군이 공산 측을 압박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1951년 8월 18일부터 강원도 양구를 향해 공격을 강화하고 있었다. 회담이 지지부진하게 흘러 또 결렬 상태에 빠진 직후인 8월 24일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내게 전화를 했다. 그는 당시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그는 문산의 평화촌에 돌아와 있던 내게 전화를 걸어 “내일 나와 같이 한국군 1군단으로 가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일단 국군 1군단이 맡고 있던 전선의 전황(戰況)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진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밴플리트 사령관을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는 달리 상황을 알아낼 길이 없었다.

동숭동의 미8군사령관실로 찾아가자 밴플리트 장군은 “전선에서 공격을 펼쳐야 하는데 1군단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함께 1군단 전선으로 가서 상황을 다시 파악한 뒤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과 동대문 밖 신설동 옛 경마장에서 L-19 경비행기를 타고 강원도 간성으로 날아가 국군 1군단 예하 11사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당시 사단 사령부는 진부령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령부에는 밴플리트 장군과 나 외에도 미 10군단장 클로비스 바이어즈 소장, 국군 1군단 부군단장 장창국 준장, 국군 11사단장 오덕준 준장, 국군 1군단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이 함께 모여 있었다.

휴전회담은 지지부진하게 흘렀지만 각 전선에서는 고지 선점을 위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미 해병대원들이 1951년 중공군 진지를 포격하고 있는 장면이다. 일부 전선에서의 강력한 공격은 공산군을 회담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낳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문제가 생긴 곳은 강원도 양구였다. 이곳은 동부전선의 ‘철의 삼각지’라고 불렸다. 양구 분지를 장악할 경우 작전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휴전회담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적을 압박할 방도로 양구를 탈환하는 공세를 펼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동부전선의 전략 요충을 탈환하면 적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작용해 회담에 신중하게 임할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적도 만만치 않았다. 저들은 이미 이곳에 6개 사단을 집결시켜 방어를 위한 거점 공사를 모두 마쳐 산악 곳곳을 요새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군은 8월 18일부터 국군 1군단이 향로봉을 중심으로 동해안을 등진 채 동쪽에서 서쪽으로 공격을 펼쳤다. 미10군단도 양구로부터 남에서 북으로 포위해 들어가면서 적을 압박하고 있던 때였다.

장창국 부군단장은 내가 휴전회담에 대표로 참석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를 대신해 1군단을 이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이 우익을 맡고, 11사단이 공격의 좌익을 맡아 깎아지른 험산에 붙어 공격을 벌이고 있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은 공격목표인 924고지를 빼앗은 뒤 적의 역습을 잘 막아냈다. 문제는 11사단이었다. 고전 끝에 목표인 884고지를 세 차례나 빼앗았으나 역시 다시 빼앗기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11사단은 혈투 끝에 금강산에서 흘러나오는 남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 중이었다. 격렬한 전투여서 사상자가 많았으나 적이 완강하게 역습을 벌여옴으로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곳의 지형은 험악했다. 높은 산악이 겹겹이 싸여 있어서 전투가 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여름철의 강한 바람과 비가 불어닥치고 있었다. 병력과 화력을 한 곳에 집중해 효과적인 공격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먼저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지금 군단이 보유한 105㎜ 야포로는 적을 공격하기 어렵다. 155㎜ 야포로 적을 때린 뒤 공격을 하면 방법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렇긴 한데, 155㎜를 어디서 구하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서슴없이 “미10군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동석했던 바이어즈 10군단장이 난색을 표명했다. 자신들의 상황도 좋지 않아 지원할 형편이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단호했다. 강한 어조로 “야포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이튿날 미군의 155㎜ 곡사포 1개 중대(6문)가 국군 11사단에 도착했다. 기상도 좋아져 짙은 먹구름이 모두 걷혔다. 바로 전선에 불이 붙었다. 6문의 155㎜ 야포가 불을 뿜고, 동해상에 떠 있던 항공모함에서 함재기까지 출격해 적진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전투는 바로 끝이 났다. 열흘을 끌던 혈투는 우리가 양구를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고지를 확보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 때문에 나는 회담장에 다시 돌아가지 않는 입장으로 변했다. 밴플리트 사령관이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인 매슈 리지웨이 장군과 협의한 끝에 나를 회담장으로 돌려보내는 대신에 전선에 복귀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유엔 측 휴전회담 수석대표인 터너 조이 제독은 나중에 적은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리지웨이로부터 김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백선엽 1군단장이 전투에 꼭 필요한 사람이므로 회담장으로 복귀하지 않고 1군단에 남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그가 통보했다.”

미군은 내가 회담장에서 빠지는 것을 두고 한국인들이 이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한국 측 새 회담대표로 이형근 장군을 선정했다는 사실만 발표하고 나의 1군단 복귀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야전(野戰)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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